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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24. 2020

라면 한 그릇의 소박한 위로

혼자만의 시간, 라면이 주었던 위로와 온기

퇴근길, 가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옆길로 샌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거나 장을 보거나 아이가 부탁한 물건을 사기 위해,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아직 가슴속에 가득 남아서,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러고 싶어서 옆길로 샌다. 대학가인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동안만큼은 회사원도 주부와 엄마도 아닌 그냥 자연인으로 존재하고 싶어서다. 의무와 의무 사이의 모드 전환을 위한 시간이라고나 할까?


길어야 1시간 남짓. 늦어도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7시 반을 넘기지 않도록 마감을 정해둔다. 그 시간 동안 익숙한 골목길에 새로 생겨나는 카페 창 안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고, 취향에 맞는 옷을 갖다 놓는 작은 옷집에 들러 옷을 구경한다. 종종 맥주를 한 잔 하거나 밥을 먹으며 책을 읽기도 한다.


번화가라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즐비하고 한자리에서 오래 장사를 해온 다양한 맛집들이 있는데도 자주 생각나는 것은 라면이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후루룩 먹는 것이 좋다. 저렴한 가격에 금세 포만감이 들고 국물 음식이 주는 위안도 누릴 수 있다. 짠 음식을 싫어하지만 라면만은 예외다. 적당한 물 양에 떡국떡이 한 움큼 넣어 꼬들꼬들하게 끓여낸 라면이 눈 앞에 놓이면 왠지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친구를 만난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든다.


10대 때, 라면은 엄마 밥이 지겨울 때면 먹는 음식이었다. 용기 내어 야자를 째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에 함께 하던 음식이기도 했다. 20대, 긴 취준생 시절에는 주머니가 가난해 천 원짜리 한 줄 김밥을 주로 먹었다. 그것에 물리고 따뜻한 국물이 그리울 때는 가끔 천 원을 더 보태어 라면을 먹었다. 그 시절의 한기가 싫어서 쳐다도 보지 않는 음식이 됐다가 30대 결혼 후, 인스턴트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다시 먹게 됐다. 나는 요리에 서툴고 남편은 할 생각이 없고 자연스레 사 먹거나 만만한 라면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


남편이 해외파견을 가고 어린아이와 둘이 남아 일상을 지킬 때부터 라면은 아이가 잠든 틈을 타 어렵게 먹는 음식이 됐다. 일과 육아 사이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상에 자꾸만 허기가 지던 날들... 늦은 밤,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도 없고(무엇보다 그럴 실력이 못 되고) 신속하게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간편한 음식이 바로 라면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국물이 목을 타고 속으로 들어가며 퍼지는 위안은 얼마나 큰가.


Photo by Markus Winkler@unsplash


퇴근 후 가지는 짧은 나만의 시간, 직장인에서 주부와 엄마의 세계로 옮겨가기 전의 중간 지점에 잠시 머무는 그 순간, 수많은 음식 중에 하필 라면을 먹는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손쉽고 저렴하게 속을 채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버텨내어 여기까지 온 내가 무의식 중에 분식집의 작은 테이블에 찾아가

"여기 라면 주세요. 떡 추가해서요."

라고 말하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는 화력의 문제인가 요리사의 실력 부족인가 밖에서 먹는 그 맛이 안 난다. 라면 냄새만 나도 쪼르르 달려와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가 있어 편히 먹을 수가 없다. 요리를 못하고 귀찮아하는 엄마가 대충 아이를 먹인다는 죄책감이 드는 데다 그걸 만회하려고 이것저것 넣은 채소와 반만 넣는 수프 맛이 라면의 오리지널리티를 떨어뜨린다. 주부가 되어보니 세상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남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다. 라면도 마찬가지다.


가끔 들르는 동네 맛집인 분식점은 오늘도 만석이다. 두 명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여섯 개 있는 세로로 긴 좁은 가게 안을 휙 둘러보니 모든 상에 라면 한 그릇이 놓여있다. 20대의 해맑은 피부를 가진 대학생들이 김밥과 라면 그릇을 앞에 놓고 열심히 면치기 실력을 자랑하고 국물을 떠먹으며 쉴 새 없이 떠들고 있다. 연락 온 썸남의 메시지에 설레어하고, 자신이 본 프랑스 영화의 특별함을 주장하며, 곧 있을 시험을 걱정하는 말들이 오간다. 묵묵히 등을 보인 채 면을 입으로 가져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라면 한 그릇의 위안은 내게만 허락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입구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이제 곧 나도 누릴 수 있는 라면이 주는 편안한 위로를 기대해 본다. 그것에 힘입어 오늘의 고단한 낮을 마감하고 저녁을 새로이 열어보련다.



#회사원엄마모드전환사이

#잠시머무는시간

#나만의시간

#혼밥

#라면이주는편안한위로

#코로나얼른끝나

#다시찾고픈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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