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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16. 2020

비로소 궁금해진 그녀들의 속사정

한 달 전쯤인가? 왼손이 갑자기 아팠다. 다친 곳도 없는데 둔기로 맞은 것 같은 통증이었다. 증상은 3일 정도 지속되다 잦아들었지만 곧 어깨와 왼팔 전체가 시리고 아리기 시작했다. 팔을 들 수 없었고 일상동작도 어려워졌다.


X-ray를 찍고 의사를 만났다. 왼손 검지와 손바닥이 만나는 부위에 10원짜리만 한 하얀 동그라미가 보였다. 다른 부위에도 흩어져 있었다. 석회라고 했다. 체외충격파 치료를 하면 수주 내에 증상이 완화된다 했다. 치료비가 비싸고 시간 내기도 쉽지 않지만 치료를 결심했다. 심한 통증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기력감도 하이킥 해서 날려버리고 싶었다.


왜 이런 것이 생겼을까 궁금해졌다. 만성 운동부족에 시달리며 앉아서 문서작업을 주로 하는 사무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주원인인 것 같다. 유난히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살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책상이 높다. 어깨와 손목 부담을 줄이려 팔이 수평을 이루도록 의자 높이를 올려볼까 했더니 160cm가 채 안 되는 아담 사이즈를 자랑하는 신체 조건상 발이 달랑 허공에 어색하게 들리는 게 아닌가.


안 되겠다. 불편한 동시에 불안하다. 자꾸만 발이 어색해 아빠 다리를 하게 된다. 원래대로 의자를 낮췄다. 발이 바닥에 닿자 안도감이 밀려온다. 기쁨을 느끼는 건 잠시, 키보드를 치는 손목과 어깨에 시간이 갈수록 다시 힘이 실린다. 일하는 중간, 나도 모르게 팔에 쌓인 긴장을 툭 털어냈다가 의식될 때 또 털어주길 반복하며 수시로 어깨에 힘 빼고 스트레칭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아픔 덕분에 비로소 몸의 감각에 민감해지다니 전화위복인가?


이 책상에서 일한 지도 어느새 5년째인데 퇴근할 때면 어깨가 무겁다 느끼면서도 통증을 비롯한 많은 감각들에 무심한 채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아프다는 내게

“그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이냐. 엄살떨지 마라. 아프다면 누구 하나 좋아할 사람 없다.”

고 했기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남들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고 '원래 이런 것'이라고 참거나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 키우며 그런 성향은 더 강해졌다. 가끔 정말 아파서 표현을 해봤지만 남편은 시큰둥하게

"병원 가 봐라."

할 뿐이었다. 누가 경상도 사나이 아니랄까 봐.


그런 남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시어머니야말로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자주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있을 때면 어디가 안 좋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수십 번 반복하셨다.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낼 때도, 행주를 비틀어 짤 때도 마치 추임새처럼 아픔을 드러내는 표현이 자동적으로 따라왔고 여기저기 안 좋다는 증세를 세세하게 설명하셨다. 하루도 아프지 않은 곳은 없었고 부위와 증세는 늘 다양했다. 남편이 아내의 '아프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아프다'는 역시나 무덤덤한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는 방편이었을까?


정반대의 사람을 엄마로 두고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시어머니의 가짓수도 많고 표현도 다양한 아픔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나의 아픔에도 둔감한데 남의 그것을 어찌 헤아리랴. 느낀다 해도 어른이라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배우고 커왔는데 갖은 아픔을 끊임없이 호소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되고 힘겨웠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처럼

"병원 한번 가 보세요."

정도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photo by Eugene Chystiakov@unsplash

손과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던 지난 시간 동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시어머니였다. 3년 전 가을, 갑자기 무릎에 문제가 생겨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된 후, 무기력감을 통증만큼이나 자주 호소하며 짜증까지 내시던 어머니를 마주할 때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야 그 기분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무덤덤한 며느리에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더불어 엄마는 도대체 왜 또 어떻게 아픔과 힘겨움을 깊은 곳에 감춘 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대상포진이 왔을 때, 잇몸이 망가져 이른 연세에 부분틀니를 시술하며 살이 6킬로나 빠졌을 때도 아프다,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사람이 우리 엄마다. 수많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드러내 봤자 받아줄 사람 없이 일찍부터 철이 들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 딱지인 걸까?


어떤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같은 문제를 다시 보게 만든다. 자신의 아픔은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처럼 지칠 줄 모르던 시어머니의 호소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는 듯 그 정도는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인 양 항상 묵묵한 엄마는 언제부터 그래야 했던 것일까? 불편과 고통의 감각에 민감해지고서야 그분들의 사정이 비로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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