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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15. 2020

작은 싹 하나의 희망

무수한 실패와 좌절에도 계속 씨앗을 심고 돌보는 삶

지난봄, 하얀 튤립 꽃이 보고 싶어 온라인으로 구근을 주문했다. 베이지 빛이 감도는 직사각형의 널찍한 화분에 양파망으로 넓은 물구멍을 적당히 가려 흙과 물이 낭비되지 않게 만들었다. 그 위에 부드러운 흙을 살살 뿌려 단단하게 다져주고 나란히 10개의 구근을 심고 흙을 덮었다.


심은 지 며칠 만에 초록의 여린 싹이 올라왔다. 아이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싹을 확인하러 갔다. 그러나 싹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자꾸만 시들어갔다. 물을 줘 보기도 하고 쉬어보기도 했다. 바람이 통하게 창가로 옮겨도 보고 햇빛을 더 받도록 해주었지만 쪼그라들기만 했다. 화분을 파 보니 구근 주변에 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식물이 주는 기쁨을 느낀 아이가 장미를 키우고 싶어 했다. 연분홍과 빨간 장미 화분을 들였지만 역시나 오래가지 못했다. 화원의 예쁜 주인이 알려준 주의사항을 지켜 적당히 물을 주었고 바람이 잘 통하면서 햇빛이 바로 들지 않는 자리에 두었다. 검붉은 와인빛이 감도는 탐스러운 장미는 화사하게 꽃잎을 피워냈지만 그 위로는 하얀 곰팡이가 앉았다. 바람 통하는 창가도 소용없었다. 연분홍 꽃도 잘 피더니 곧 친구 따라 시들시들해졌다.


그 뒤로 모종 가게에서 상추와 딸기도 사 왔지만 시들기 바빴다. 이쯤이면 킬링 맘 등극이다. 뭘 키워도 죽이고 마는  마이너스의 손. 덕분에 우리 집 베란다 화원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짝 오렌지 맛이 감돌고 새콤한 카라향이라는 귤을 먹었다. 그 안에는 끝이 뾰족하고 단단한 씨앗이 몇 개나 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씨앗을 늘어놓다가 아이와 함께 심어보기로 했다. 놀고 있는 빈 화분에.


주말이 되었고 늘어놓은 씨앗은 적당히 잘 말라 있었다. 아이와 함께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다. 그리고 잊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출근 준비를 하며 건조망에 널린 속옷을 가지러 베란다로 가는데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작고 여린 초록의 잎이었다. 그때 심은 카라향의 싹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이가 반색을 했다. 작은 싹은 긴 장마와 더운 여름 날씨를 견디고 이파리 수를 늘리며 아주 조금씩 커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너는데 딸기가 시든 뒤 비어있는 화분의 흙이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뭐지?' 생각했는데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다시 출근하신 엄마가 베란다로 가더니

"이것 봐라. 싹이 올라왔네."

하셨다.


지난 금요일 엄마가 심은 열무씨가 싹과 꽃을 피웠다.


 보니 어제만 해도 없던 초록의 싹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오래전 어느 식목일을 앞두고 아이 어린이집에서 행사 준비용으로 화분과 씨앗을 준비해 달라고  적이 있었다. 그때  열무 씨앗이 그대로 있었는데 심으신 모양이었다. 퇴근해 오니 화분 가득 싹이 올라오고 진분홍의 꽃도 피어 있었다.




여린 싹을 보여주다 뿌리부터 서서히 썩어버린 튤립처럼 어떤 일들은 마음을 먹고 계획을 하고 애를 써서 돌봐도 내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을 다하고 노력해도 한번 썩기 시작한 뿌리는 계속 썩을 뿐이다. 그러나 재미 삼아 가볍게 심은 씨앗이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며 오래 내 곁에 머물기도 한다. 원했던 바와는 다르지만 어쩌면 이것이 나의 잠재력이고 타이밍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던 씨앗도 사람과 때를 만나 자기의 가능성을 펼치기도 한다. 하루 만에 마법처럼 큰 화분을 가득 메우며 솟아난 싹들을 보면서 올해 내가 심었던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지만 도중에 시들고 상해버린 수많은 계획들... 처음 꿈꾸었던 정원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카라향의 잎사귀와 열무 새싹들이 알려주었다. 꾸준히 무언가를 심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처음 품었던 꿈과 다른 모습이라도 의외의 기회는 생겨나고 설렐 수 있으며 결실의 기대를 계속해서 품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작은 정원에서는 단아한 하얀 튤립의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았고 화사한 연분홍의 장미가 가진 향기도 풍기지 않았다. 딸기는 잠깐 열매를 보여주다 시들었고 상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디지만 조금씩 잎사귀를 더하며 점점 지해지는 초록의 카라향 줄기와 기다렸다는 듯 때를 만나자마자 무수하게 잎사귀와 작은 꽃을 피워내는 열무와 가 잔잔한 감동과 작은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기대와는 다르지만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삶이기에 오늘 또 하루,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보살피는 일을 이어나가야겠다 생각한다. 지치고 흔들리더라도 계속해서.



#베란다 정원

#식물 키우기

#씨앗을 심는 일

#꾸준히 돌보고 가 꾸는 일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심고 가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언젠가 의외의 모습으로

#결실을 맺을 기대를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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