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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28. 2020

어떤 가족의 제사날

매년 이맘 때면 시아버지의 제사가 돌아온다. 추석을 코앞에 둔지라 명절을 보너스로 받은 느낌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연휴가 덤으로 주어지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며느리의 의무 면에서다. 박카스 한 병을 시원하게 원샷하고 시집으로 향했다.


제사나 차례 준비에서 내가 담당하는 것은 어머님이 미리 장을 봐 두고 밑준비를 한 것들을 각종 음식으로 바꿔내는 일이다. 뒷베란다의 타일 위에 신문지를 깔고 수평을 맞춰 휴대용 버너를 놓고 중국식 웍에 식용유를 적당히 부어 기름을 달군 후 몇 가지 종류의 튀김을 튀겨내고 전을 굽는다. 그리고 산적과 생선 굽는 일을 끝내면 어머님은 나물과 국을 끓이고 마무리가 된다.


평소 우리 둘이서 음식을 준비하지만 아버님 제사에는 고급인력 한 명이 추가된다. 바로 손위 시누다. 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올케를 아이처럼 대하며 가르치려는 면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사에 판단이 들어가서 대화가 길어지면 피곤함도 찾아온다. 시집살이는 회사생활과 참 닮았다. 그래도 솔선수범하고 잘 챙겨주려는 좋은 분이라 마음 놓고 원망할 수도 없다.


곁에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지시 또는 참견하는 일로 음식 노동의 작업이 시작되고 끝난다. 마음 같아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처럼 길지만 구석구석 아름다운 음악을 귀에 꽂고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 가며 조용히 혼자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대신 듣는다. 어떻게 만들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요리건만 자신의 방식이 갖는 당위를 큰 에너지를 들여 강조하는 그녀를 보면 가끔은 진심으로 감탄한다. 내겐 분명하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관이란 말해봤자 입이 아프거나 거부당해 속 상하는 일이 일쑤인 시월드에서는 가급적 말을 아끼고 열심히 룰을 설명하거나 강조하는 사람의 의견에 맞춰주는 것은 가뜩이나 부족한 나의 에너지를 아끼는 길임을 늘 깨닫는다. 비겁한 순응일까? 자문하고 이어서 자답한다. 오랜 세월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온 이들에 대한 존중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놓음이라고.


아침 일찍 와서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뒷베란다 구석에서 허리 한번 못 펴고 일을 해도 어머님의 입에서는 며느리에게 피곤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남편이 곁에 있을 때는 일찍 출근하려면 피곤하겠다는 말을 아들에게 하시더니 이젠 일곱 살 아이가 다음날 유치원을 가냐고 묻는다. "가야죠."라고 대답하자 "피곤해서 어째."라는 애정 가득한 말씀이 이어진다. 단순한 걱정인지 피곤하니 하루 쉬게 해 주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지 생각 많은 며느리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관둔다. 약간의 서운함도 함께 사라진다.


세상 제일 바쁜 사람처럼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비우며 주방과 거실을 부산히 오가던 시누는 내가 튀김의 마지막 단계인 대망의 고구마튀김을 시작했을 무렵, 곁에 와서 쪼그려 앉았다. 이번 명절에 자신의 시집에서 저녁 늦게 올 것 같아서 어머님이 혼자 계실 상황이 마음 쓰인다는 말을 전한다. 이어서 '남편(자신의 남동생)이라도 있으면 엄마랑 좀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텐데...'라고 덧붙인다. 그러고는 여운을 남기고 가 버렸다.


몇 년 전 자신의 시댁 차례에 가져갈 튀김을 내게 부탁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시누의 느닷없는 명절 안내는 언뜻 들으면 꼭 들어줘야 할 만큼 강력한 이유들이 늘 있다. 그때는 시누라기보다는 남편과 어머님에게 마음을 많이 다쳤다. 실제로 차례 음식을 준비할 며느리 앞에서 딸이 시댁에 가져가기 위한 음식을 좀 더 해달라는 부탁에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조상이 섞인다고 걱정을 하던 시어머니, 누나가 잘해주는데 그깟 튀김 하나 하면서 불평불만한다고 나쁜 여자 취급하던 남편의 말과 태도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와서 모처럼 명절을 맞아 시누 가족과 가진 저녁 자리에서 동태전을 굽던 시누를 보며 딸(누나)이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도와주지도 않고 엉덩이 붙이고 가만히 있다고 하루 종일 기름 뒤집어쓰며 일한 내게 눈치를 주다 결국 시누 곁으로 가 불가를 지키던 두 사람이 오랜 세월 명절마다 시외가까지 가야 했지만 꾸역꾸역 참았던 내 마음에 거센 불씨를 지폈다. 어머님도 그렇지만 남편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발단은 시누의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시누는 명절에 아들도 없이 혼자 있을 어머니를 걱정하는 효심 가득한 딸의 마음이 앞서 그것을 대신해서 챙겨야 하는 며느리가 받을 부담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내게 있어서도 시어머니가 혼자 있는 풍경은 일하다가도 맛있는 것을 먹다가도 종종 떠오르는 애잔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우리가 1년에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니고, 한 달에 한번 꼴로 만나고 있으며 무엇보다 명절 전날 아침 일찍 시집으로 가 하루 자고 당일 점심을 먹고 친정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아이를 봐주고 계시니 주 5일 아침, 저녁으로 친정엄마를 보고는 있지만 그 이유 때문에 명절 외에 친정에 갈 일이 거의 없고 실제로 지난 구정 이후로 친정에 가 보지 못했다. 주말까지 부담이 될까 봐 친정은 더욱 가기 힘든 곳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는 자주 가는 친가보다 외가에 갈 순간을 설레어하고 나도 명절 당일 오후에는 모처럼 친정 식구들과 한가롭게 뒷짐을 지고 산책을 하거나 햇빛을 쬐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남편이 돌아오면 나만큼이나 어머님도 시누도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매몰차게 아침 차례상 물리고 바로 간 적 보다 어머님 기 살려드리려고 시외가까지 가서 외삼촌 내외와 많은 조카들 용돈까지 챙기고 간 날이 많았는데 그런 말을 해 봤자 의미 없을 것이다.


아직도 자식에게 의존하고 심적 독립을 하지 못한 시어머니보다 그것을 마음이 불편해 보지 못하는 시누와 남편이 어쩌면 어머님에게서 아직도 어떤 자립을 못했구나 생각했다. 그들과 현명하게 공존하며 내가 상처입지 않는 삶을 고민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끝나지 않는 네버엔딩 스토리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허리와 팔이 미친 듯이 쑤실 만큼 앉아 있을 시간 하나 없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쉬었다. 시간이 다가와 제기를 꺼내 닦고 음식을 차렸다. 맏며느리 8 차에 어설프게나마 음식 담고 차리는 일은 그럭저럭 쳐내게 되었다. 큰삼촌 내외가 오시고 제사상이 속속 차려졌다.


Photo by Europeana@unsplash


오랜 세월의 굴곡진 역사를 함께 하지 못한 관계자 외의 인물인 나는 제사로 모여 앉은 시집의 사람들의 얽히고 엇갈리고 대립되는 생각의 갈등을 싫든 좋든 목격하게 된다. 마치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처럼 가족들은 의미 있는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한 자리에 마주 앉아 놓고도 정작 산 자들 간에 쌓아온 서로 간에 대한 미움과 서운함, 갈등을 미묘하게 드러낸다. 죽은 자는 어떤 통로이자 은유로 존재할 뿐이다.


사실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 제사나 차례 준비 풍경에는 남편의 숙모님들이 늘 함께 했다. 물론 장을 보고 밑준비를 하는 어머님의 일이 제일 손도 많이 가고 힘이 든다. 행여나 음식이 부족할까 누군가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도 하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자리다. 하지만 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큰 숙모님이 주로 맡고 내가 보조하며 막내 숙모님이 잔잔한 일을 챙기는 식으로 이뤄졌음에도 늘 제사가 끝나면 어머님이 시누에게 본인 혼자 일을 다 한 것처럼 숙모님들은 꾀를 부린 것처럼 말씀을 하셔서 의아하고는 했다.


시누는 이런 사정을 잘 모른다. 분명 내가 함께 하지 않은 시간 동안 시누와 어머님이 숙모님들에게 가진 서운함과 못 미더움의 사건들이 쌓였을테다. 언젠가부터 시작되어 큰 덩어리로 굳어버렸겠지. 마치 큰 형님의 제삿날을 착각해서 지각을 한 막내 삼촌이 미리 연락을 하지 않는 시누에게 서운함을 강하게 드러내셨던 것처럼. 그러나 형님의 입장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사에 오라고 강요하는 부담감을 안은 어려운 일이었고 더군다나 어머님은 그분들이 오지 않을까 봐 마음을 쓰셨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답답함도 형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각자의 입장이 있었다. 어느 입장도 절대적이지 않고 완벽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들어온 어머님의 생각과 시누의 해석은 편견이 가득한 한 개인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 서운함이었다. 그것은 한 번도 제대로 표면 위로 드러나 다루어지지 않았고, 내 속의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숙모님들과 삼촌들의 속마음도 모두가 각자의 입장이 있고 오해는 풀릴 기회도 없이 그렇게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서 묻히고 흘러가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아버님께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절을 끝내고 이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온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분절된 이해라고는 해도 아주 조금은 이 사람들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또한 이 가족 모두를 제대로 다 알지 못한 채 어떤 편견 가득하고 고정된 이미지를 계속 굳혀가고 있을 것이었다. 그 영원할 단절로 이어졌다는 동질감에 켜켜이 쌓아온 거리감을 가능하다면 조금은 허물고 싶어 졌다. 분주하게 움직여 늦은 저녁상을 차려내고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아이 밥을 차려 나도 앉았다. 마침 좌우로 사람들의 표정을 살필 수 있는 자리였다.


정리되지 않은 거칠고 높은 목소리들이 마치 격렬한 전장처럼 오가는 곳 한복판에서 세계대전의 중립국처럼 조그맣게 자리 잡고 앉아 결코 서로 이해받지 못할,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채 부유하다 가라앉거나 운이 좋아 건져 올렸다가도 이내 떠내려 갈 삶을, 그 안의 가족을,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를 떠올렸다. 어렴풋이 알 텐데도 굳이 특별한 날이면 마주 앉아 무언가를 기대하며 모여 앉아 꾸역꾸역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나누는, 그래 왔으니까로 퉁치며 실망하고 또 기대하는 이 일을 반복하려는 외롭고 오해 많고 완벽하지 못한 우리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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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기대

#엇갈리면서도나란히걸어가려는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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