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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Sep 29. 2020

술이라는 삶의 친구

어느 애주가의 혼술 예찬

술을 즐긴다. 스무 살부터 현재까지 맥주와 와인에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적지 않은 돈을 써 가며 20년 넘게 마셔왔다. 술이 센 편은 아니라 도수 높은 주류는 잘 마시지 못해 소주, 위스키, 코냑, 보드카며 백주 등에는 큰 관심이 없는 반쪽 짜리 애주가다.


국민학교 시절, 아빠의 친구 가족들과 해수욕장에 갔다가 대접에 부어놓은 소주를 물로 착각하고 들이켰다 뿜은 경험을 제외하면 처음 술을 접한 것은 대학 신입생 OT였다. 소주 애호가들께는 죄송하지만 식용 알코올과 다름없는 언제 마셔도 획일적인 맛의 소주를 그것도 같은 잔에 돌려가며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1학년 내내 '먹고 죽자.'는 선배들 눈치 맞춰가며 약 먹는 기분으로 겨우겨우 마셨다.


해가 바뀌고 한 복학생 선배와 사람이 스무 명 가까이 들어찬 동아리방에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 술도 같이 마시게 됐다. 그 선배는 제대 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밴쿠버에서의 경험으로 버드아이스라는 병맥주를 시켜줬다. 물론 친구들과도 없는 돈 털어가며 세계맥주집에 가끔씩 가보긴 했지만 술맛과 향을 따져가며 마시는 사람을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술이 참 맛있구나.' 하고 느꼈다.


선배와는 집이 가까워 방학 때면 먼 학교 대신 집 근처 국립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귀갓길 종종 병맥을 한잔씩 하고 헤어졌다. 그 시간이 좋았다. 나누는 대화도 그렇지만 순수하게 술을 음미하며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대였다. 친한 친구들과 맑은 홍합탕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이 상대와 함께 한다는 행복한 술자리 추억으로 남아있다면, 선배와의 시간은 술 자체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개인의 취향을 발견하고 지지받는 경험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맛과 향을 느끼며 술 마시는 걸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20대의 수많은 날들과 여러 여행, 외로웠던 외국생활에서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잔의 술과 함께 보냈다. 종종 외롭던 외국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 중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맛있는 술 한잔을 할 수 있는 공간에 가 보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불안하던 이십 대의 시절에는 오랜 절친과 청춘의 고뇌를 나누면서 술잔을 부딪혔다. 직장인이 되어 안정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을 때부터는 오래도록 관심을 가졌던 모임에 나가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애주가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최애 와인 중 하나인 부르고뉴 피노누아, 몽자르 뮈레네의 본 로마네


'저'마트에서 판매하는 8천 원이 채 안 되는 칠레산 샤도네이부터, 상태 좋은 것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격도 상당한 부르고뉴 산 피노누아에 이르기까지 와인은 언제, 누구와 어떤 음식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개성과 그에 따른 맛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와인도 태어난 해(빈티지)와 양조장(생산자 스타일과 환경), 보관상태와 그 병을 열고 마시는 이의 수준에 따라 맛이 다르니 그 매력에 빠지게 된다.


좋아서 뭔가를 시작하면 웬만한 수준이 되어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다. 고작 술일뿐인데 대충 마셔도 별일 없을 텐데 가볍게 마시기 좋은 테이블 와인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마시면 마실수록 더 좋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많이 알고 싶은 욕망 게이지가 올라간다. 정기 모임과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번개모임까지...적당히 통제하지 못하면 차 한대 값은 우습다.


이 성격에 와인을 하려니 평범한 직장인 월급으로 유지하기는 무리라 판단되어, 적절한 시점에 모임은 그만두었다. 마침 회사도 바빠지고 담당 업무와 관련하여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되면서 애주가의 리즈시절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술 한잔을 마셔도 취향을 살리고 그 술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가고 같이 마시는 사람들과 각종 취미를 공유하는 나날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호시절이었다. 언젠가 나이가 좀 더 들고 여유가 생기면 남편을 꼬셔 유럽여행을 겸한 와이너리 투어를 해 보고 싶다.  


와인은 한 병이 750ml이기도 하고 적절한 음식을 곁들여야 좋은 데다, 늘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과 느낌을 공유하며 함께 마셔오다 보니 혼자 마시기는 재미가 없다. 적어도 내겐 혼술로 적당한 아이템이 아닌 거다. 남편이 한국 오갈 때 면세에서 좋아하는 독일 리즐링이나 고급 쇼비뇽 블랑을 사 오기도 하고 한때 단골이라 요즘도 백화점 와인코너 매니저가 특가 뜨면 메일을 보내주어 종종 구매하지만 보관만 할 뿐 마실 기회가 좀처럼 없다. 아이는 어리고 와인 친구들 만나긴 여의치 않아 다시 맥주로 돌아왔다.

 



그렇다. 내게 혼술은 맥주다. 예전에는 유럽에 가야 마실 수 있던 벨기에며 이탈리아 맥주를 동네 편의점 냉장고에서 네 캔 만원, 카드 행사까지 하면 무려 오천 원에 쉽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덕분에 다양한 나라의 맛있는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이 편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갈수록 다양한 개인의 취향 또한 충족할 수 있는 시대에 술을 마실 수 있는 신분이라니 행복하다. 커피의 에스프레소 샷과 시럽, 토핑의 추가처럼 맥주의 선택지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IPA(India Pale Ale)가 그중 하나다. 긴 휴가 복귀 후 다사다난했던 한주를 잘 마무리한 나를 위해 불금 맥주 한 캔을 하려고 오랜만에 편의점에 들렀다. 요즘은 한잔만 해도 알딸딸해서 육아에 방해도 되고 새벽 글쓰기 하는데 체력이 딸리기도 해 가성비를 따져 청정 맥아로 만들었다고 광고하는 국내산 맥주 한 캔 정도로 만족하고는 했다. 집 근처에 괜찮은 수제 맥주집들이 있지만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고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IPA를 골랐다. 우리나라 양조장에서 만드는 IPA였다. 한 캔은 아쉬워서 같은 양조장 출신 필스너, 페일 에일과 함께 삼총사를 모셔왔다. 마셔보지 않은 맥주를 만나니 설렌다. 역시 나는 애주가가 맞는구나.


국내 양조장에서 만든 에일 삼총사

혼자서 애 보는 입장에서는 나가 마시기가 어려워 남편에게 갈 때면 원 없이 맥주를 마시고 온다. 그때 가장 자주 마시는 것이 IPA다. 상해에서는 좋아하는 생맥 버전으로 꽤 다양한 IPA를 맛볼 수 있어 행복하다. 주로 구스 아일랜드 같은 미국 것이 많지만 집 근처에서 보기 드문 독일이나 영국산도 마실 수 있다.


대영제국 시절,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본토에서 맥주(Pale ale)를 배에 실어 보내면 적도 건너는 도중에 상해버렸다. 고민 끝에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많이 넣어 만든 맥주가 오래 견딘다는 걸 알게 되었고 IPA(India Pale Ale)라는 이름이 붙었다. 홉이 많이 첨가되다 보니 특유의 쌉싸름함과 과실 향 같은 강한 개성이 있어 깔끔하고 청량감 있는 라거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안 맞을 수도 있다.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좀 높은 편이고 시트러스나 산초 같은 향신료 향 싫어하면 패스하시길.


취하고 싶어 술을 마신 적은 없다. 내게 술이란 감각을 일깨우거나 완화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어떤 술은 오랜 친구와의 대화 같고, 어떤 술은 유년기의 감수성을 불러일으켜서 좋다. 요즘같이 하드보일드 한 시절을 나고 있는 때, 한잔의 술은 하루 또는 한주의 빡빡한 긴장을 살짝 풀어주고, 말할 상대 없는 혼자만의 밤에 가끔씩 차오르는 헛헛함을 따스한 취기로 달래준다. 맨 정신으로는 좀처럼 꺼내기 어려운 속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도 얻고 도무지 다스릴 수 없는 가슴속 갈증을 적시기도 한다.


남편이 상해로 떠난 첫해와 둘째 해, 6년간 몸담았던 부서를 떠나 지역까지 바뀌며, 낯선 환경과 인간관계, 업무에 적응하려 몸부림치던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공백은 시댁에서의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분명 가족임에도 진심과 다르게 가 닿는 마음, 늘 내 몫으로 가라앉던 단절감으로 잠을 설치던 시간이 있었다.


힘이 든 날이면 아이에게 내색을 할 수 없어 꼭꼭 눌러둔 감정이 북받쳐 아이를 재우고 냉장고 속 맥주 한 캔을 꺼내곤 했다. 손가락으로 힘을 줘 당기면 갇혀있던 탄산이 빠져나오며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알루미늄 캔 뚜껑과 함께 가슴속의 무거움도 같이 떨어져 나가길, 한잔이 주는 취기로 이 하룻밤만은 조금 따스하게 누그러진 위로를 기대하며 첫 모금을 꿀꺽 목으로 흘려보냈다.


그 모든 순간에 좋은 벗이 되어준 술. 20대와 30대, 젊고 빛나고 늘 누군가가 옆에 있던 화려한 시절에는 즐거운 시간, 좋은 관계의 윤활유가 되었고, 혼자서 삶의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세우며 지켜나가야 하는 지금은 어떤 위로와 휴식의 안도감, 공감을 주는 술. 혼술을 예찬하고 있지만 역시 술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즐겁다. 언젠가 그림책모임에서 한잔하며 함께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다. 둘 다 내게 있어 언어가 미처 전하지 못하는 것들을 살포시 일깨워 건드려 주는 존재이므로.


퇴근길 아직 마셔보지 않은 맥주(그것도 IPA라며!)를 사 들고 와서 혼맥 하는 금요일 밤, 아직 잠들기엔 아쉽고 앞으로 주말 이틀이 내 앞에 펼쳐져 행복하고 여유로워 그저 기쁜 이 순간. 이 시간을 만끽하며 애주가의 혼술 예찬을 의식의 흐름대로 펼쳐놓아 본다. 입 안에 퍼지는 향긋하고 쌉싸름한 한 모금의 맥주를 마시면서 ‘인생 뭐 별 거 있나? 좋아하는 것들을 확실히 알고 때로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괜찮은 삶이지.’ 생각한다.




#애주가의혼술예찬

#작지만확실한행복

#IPA맥주

#혼술은맥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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