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23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는 잊힌 좋은 책을 발굴해 널리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참여 신청을 할 때, 떠오른 책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였다. 출간된 지 5년 즈음된 이 책은 브런치에 리뷰가 없을 뿐 유물 수준의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목적에 맞지 않는 게 아닌가? 고민하며 책장을 뒤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책 이어만 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내겐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오랜 시간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게 해 준 책이었고, 분명 세상에는 아직 피츠제럴드를 만날 기회가 없었거나 <위대한 개츠비>만 읽어본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하며,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쓰인 그의 단편소설의 매력을 알리고픈 마음과 2020년 가을,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주제로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상실의 아이콘, 피츠제럴드
상실을 다룬 예술가는 많다. 하지만 그 자체로 삶이자 전설로 남은 이로 F. 스콧 피츠제럴드만 한 인물도 없지 않을까.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1학기, 문학과 영화 수업에서였다. 세월에 아스라이 잊혔지만 교수님이 질문을 던졌던 '위대한(The Great)'의 중의적 의미,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개츠비가 저 멀리 이스트에그의 초록 불빛을 응시하던 모습만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았다.
피츠제럴드를 읽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었다. 나의 이십 대에는 늘 하루키가 함께 했다. 그의 글을 읽었고 그가 소개한 작가를 찾아보았고 음악을 들었다. <노르웨이의 숲-번역서 제목 : 상실의 시대,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의 선배 나가사와가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었다면 나와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피츠제럴드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20대의 나는 개츠비의 상실에 별다른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작품 속 빈번하게 쓰인 은유도 어려웠고 아메리칸드림, 스노비즘과 허망한 몰락이 막 청춘의 낭만에 가슴 가득 부푼 스무 살에겐 와 닿지 않았다.
그 이후 긴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번의 경제위기가 지나갔고 세상은 분명 편리하고 풍요로워졌지만 물질만능주의로 변해 가며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새해 덕담을 '부자 되세요!'로 바꾼 광고가 대히트를 쳤고 사람들은 행복이 마치 성공의 필연적 결과인 양 자기 계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경제적 효용과 가치로 평가받았다. 마치 피츠제럴드가 사교계의 왕자로 군림했던 재즈 시대(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경제 호황기)의 미국처럼. 나도 개츠비(피츠제럴드)처럼 '조류를 거스르며 끝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배'의 하나였다.
대학의 졸업과 동시에 몇 년을 고스란히 바친 도전이 실패하며 그렸던 미래 또한 좌절되었다. 상처와 열등감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고 삶을 망친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나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성취의 열망에 사로잡힌 채 30대 초반을 보내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삶은 갈수록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사람이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세상 흐름에 굴하지 않는 태도로 언제나 소년의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꿈꾸었던 어린 날이 무색했다. 현실은 내 앞에 닥쳐왔고 쫓아가 보아도 잡힐 듯하면서 멀어져만 갔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와의 만남
5년 전, 늦가을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피츠제럴드를 만난 건. 그 해가 밝자마자 남편은 혼자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떠났고 혼자 남아 세 살배기 아들과 일상을 지켰다. 나 또한 6년간 몸담았던 근무지를 떠나 인사이동된 터라 그 해를 꼬박 바뀐 시스템과 업무, 사람에 적응하며 보내야 했다. 막막한 육아와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 늘 떠난 아들을 애달파하며 감정을 쏟아붓기 바빴던 시어머니. 승진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직장 속 나의 위치와 나이에 비해 일군 것 없는데서 추락한 자존감은 불안한 미래, 기댈 곳 없는 외로움과 함께 수시로 나를 갉아먹었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 도무지 태연하게 앉아 일에 집중할 수 없던 어느 날, 반차를 내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다른 계절로 넘어가려는 채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깊은 정취를 간직한 늦가을 오후 햇살이 눈이 부시게 빛나면서 너그럽고 태연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사람들 속으로 숨듯 바삐 걸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자유 시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무의식 중에 발길이 멈춘 곳은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앞이었다. 모처럼 시간을 낸 김에 아이가 나오는 시간, 짠! 하고 나타나 까르르 웃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원 시간을 기다리며 어린이집 근처 국립대학의 오래되고 좁은 골목길을 커피 한잔 들고 걸었다. 한 블록 아래, 작은 재래시장이 있었고 할머니들이 생선이나 채소 같은 것을 쨍한 색감의 플라스틱 소쿠리에 넣어 팔며 "새댁, 이거 싱싱하다. 함 봐라."며 나를 불렀다. 옅은 미소로 목례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중 터널처럼 보이는 통로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철물점과 목적을 알 수 없는 가게 곁에 비건 식당이 하나, 그리고 작은 서점이 보였다.
망설이다 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보았다. 우아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이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얼굴을 들어 나지막하게 "어서 오세요." 인사를 했다.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태연한 척 목례를 하고 곧바로 쌓여있는 책 무더기로 눈을 돌렸다. 페미니즘, 유목 철학 관련의 작가와 책들, 벽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보며 '아, 말로만 듣던 독립서점이구나.' 했다.
공간과 주인장이 가진 독특한 아우라 때문에 아무 책이나 골라 들면 안 될 것 같아 고민하다 하원 시간이 다 된 걸 깨달았다. 눈에 띄는 한 권을 급히 골랐다. 바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였다. 세계문학 전집으로 유명한 민음사가 부피도 가격도 부담 없이 펴낸 쏜살 문고 중 한 권이었다. 주인장은 책을 건네받더니 노트에 볼펜으로 책 제목 등을 직접 써넣고 서점의 로고 도장이 거칠게 박힌 크라프트지 재질 빵 봉투에 책을 넣어 건넸다.
가방에 봉투를 대충 찔러 넣고 아이를 데리러 갔고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저녁을 보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날들을 살아내면서 언젠가 읽어야지 하던 어느 늦은 밤,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그날 오후의 감각이 확 살아났다. 피츠제럴드 바로 자신의 삶이었던 이 짧은 소설들을 한편 한편 읽어 내려가며 비로소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알아차리고는 흐느껴 울었다. 어느새 나도 마흔에 바짝 다가섰고 찰나의 빛나는 순간을 겪었지만 늘 저 멀리 먼 곳에 있는 초록 불빛-막연한 행복-을 손에 넣으려는 사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잃어버린 채 조금씩 늙고 쇠락해 갈 것이었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가 담고 있는 상실과 슬픔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문학의 기념비적 대표작 때문에 사람들은 피츠제럴드가 성공한 천재로 요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는 개츠비 그 자체인 삶을 살았다. 엄청난 성공과 부를 거두고도 평생 첫사랑이 안긴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보상심리로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느라 늘 빚에 시달리고 알코올 중독과 폐질환 등 건강의 위협을 받았다.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을 쏟아부은 <위대한 개츠비>며 <밤은 부드러워>는 그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피츠제럴드는 하룻밤만에 뚝딱 한편을 완성하는 문학적 영감을 발휘해 160편에 달하는 단편들과 몇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왕성한 창작욕의 결과물인 수많은 단편소설들은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한 빚과 젤다의 치료비에 허덕이며 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단편소설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를 연구한 수많은 사람들은 글을 쓰는 동안만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진정한 소설가였다고 말한다. 당대의 시대상과 인물들의 모습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시대를 초월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단편들은 그가 얼마나 빛나는 재능의 소유자였는지 증명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피츠제럴드는 자기 작품을 제 돈을 주고 살 정도로 몰락했고 결국 술 때문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야심 찬 재기작 <마지막 거물>은 미완으로 남았고 개츠비의 장례식에 아무도 오지 않았듯이 피츠제럴드의 장례식도 초라하고 외로웠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그는 자신의 삶과 사람들을 소재로만 글을 써낼 수 있는 작가였고 덕분에 피츠제럴드의 소설에는 그가 살았던 재즈시대 전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짧은 작품들은 화려한 시설이 간 후 짙게 드리운 상실을 아름답지만 처연하게 드러낸다. 파티는 끝나고 술에 취해 꾸었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밀려드는 서글픔 같은 심상을 각각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훗날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작품 중 하나인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에서는 폐쇄적인 백인 상류층 계급의 상징인 프린스턴 대학을 중퇴한 피츠제럴드 본인인 듯 한 인물 존 T. 웅거가 나온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룬 부가 하루아침에 허공으로 사라진다는 개츠 비적 설정을 이 소설에서도 보여준다.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산을 가진 브래덕 워싱턴은 자신이 이룩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가 가진 부에 대한 절대적 신념과 그것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허상과 몰락을 인상적인 문학적인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마치 눈에 그리듯 보여주다가 갑작스러운 결말에 다다르는데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서 보물을 가득 품은 숨겨진 세계가 발견되고 모험을 통해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전개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가난하면서 동시에 자유로울 수는 없어. 이미 그렇다고 확인된 걸. 둘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자유를 선택하겠어. 그건 그렇고, 보석 상자 안에 든 걸 주머니에 꼭 챙기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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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별이 있다고 인식해 본 적이 없어. 늘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커다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했지. 이제 별이 두려워. 별은 모든 게 꿈이었다고, 내 젊음이 모두 꿈이었다고 느끼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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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외출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젤다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것 같은 작품 <기나긴 외출>은 의미심장한 서두로 시작한다. 중세시대 우물 속 지하감옥에 갇힌 듯 끝이 없는 기다림의 형벌을 부여받은 부인은 과연 괴로울까? 아니면 행복할까? 남편과 아주 행복했던 킹 부인이 믿을 수 없는 비극 앞에 선택한 삶의 방식은 잃어버린 행복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피츠제럴드는 꽤 오랜 시간 젤다의 치료를 위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애를 썼지만 그들의 관계는 결국 파탄이 났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젤다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새 옷과 모자를 장만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후 약속된 시간, 매일 로비에 나타나는 킹 부인으로 재탄생시킨 그는 그렇게라도 젤다의 행복을 바랐던 것일까? 이미 사라져 버린 행복한 꿈을 가슴에 안은 채 매일의 기대를 반복해야 하는 '삶이라는 잔인한 형벌'의 속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남편이 늦어지고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물론 실망스럽지만 내일 온다고 하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하루쯤 더 기다린다고 무슨 대수겠어요?
의사 선생님, 제 말이 맞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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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해외여행> 또한 피츠제럴드 부부의 자전적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소설이다. 실제 그들은 파리를 거점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유럽 각지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몇 년 간 지속했다. 이 소설은 훗날 <밤은 부드러워>라는 장편 소설로 발전했다. 재기를 노리고 심혈을 기울인 피츠제럴드의 추락에 모터를 달아준 작품이기도 하다. 젤다와 피츠제럴드는 이 시절 서로 다른 사람들을 사귀었고 젤다의 조현병 증세와 함께 두 사람이 실질적인 파국에 큰 영향을 미친다.
최초 두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했던 켈리 부부의 '기나긴 외출'은 인상적인 결말의 충격을 통해 낭비해 버린 삶과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상실을 강하게 전한다. 이런 소설을 하룻밤에 금세 써내고는 했다는 그는 분명 천재적이었지만 니콜과 넬슨처럼 그와 젤다도 둘이서 오롯이 충만했던 순간의 의미를 모른 채 삶을 낭비해 버렸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하면 그 끝에 빛나고 완성된 자신들과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환상을 품고서. 하지만 내리막길에서 가속력이 붙어 제어가 안 되는 자동차처럼 끝없는 나락과 불행을 향해 돌진해 갔다. 작품 속의 부부도 그들도.
“어디나 똑같아요. 중요한 건 거기 누가 있느냐죠. 새로운 장소는 아무리 좋아도 삼십 분이면 끝이고, 그다음에는 자기 나름대로 보고 싶어 해요. 그래서 여행지도 유행을 타는 거예요. 사실 장소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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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야. 왜 우리가 평화와 건강과 사랑을 차례차례 잃었을까? 우리가 안다면, 누가 우리에게 말해준다면, 노력할 수 있을 거야. 아주 열심히 노력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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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있는 삶
<분별 있는 삶>은 중산층의 가난한 피츠제럴드가 남부 지방 판사의 딸 젤다로부터 파혼당한 후 다시 결혼하기까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듯 한 작품이다. 사랑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을 희생한 조지 오켈리는 드디어 연인 존퀼 캐리를 만나러 테네시 주로 간다. 이제 그는 작년 그녀로부터 '분별 있는 일'이 아니라며 청혼을 거절당한 것을 만회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지역신문조차 그의 성공을 기사로 실었다. 그러나 그녀를 되찾으러 가는 순간, 조지 오켈리는 어느새 변해버린 자신을 문득 깨닫는다. 그런 일이 우리의 삶에서도 분명 있지 않았는가...? 그때의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 것.
맹렬히 노력하여 드디어 손에 쥐었건만 그 사랑은 이미 저 멀리 과거로 사라져 버렸다는 허망함. 왕카이 웨이가 <동사서독>을 통해 '사막의 모래처럼 변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라고 했듯이. 이 작품에서도 피츠제럴드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계급 상승과 성공 추구가 주된 요소로 등장하는데 <낙원의 이편>의 엄청난 히트 후, 아내 젤다에게 다시 청혼을 한 피츠제럴드의 심정이 그랬던 것일까... 생각하다 보면 몹시 씁쓸한 기분이 된다. 우리 삶의 4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는 대목에 머물다 보면 피츠제럴드 특유의 시적 감수성과 상실의 애수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작품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으며 살아가는가...?
“조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당신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만약 두 달 전에 당신이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더라면 전 결혼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그건 분별 있는 일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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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그가 느끼던 비현실 감은 더욱더 커졌다. 결국 이 방은 그저 하나의 방일뿐 그가 그렇게도 비통한 시간을 보냈던 마법에 걸린 방이 아니었다. 그는 의자에 앉으면서 그것이 그냥 의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자신의 상상력이 이 모든 소박하고 낯익은 사물을 그동안 왜곡하고 아름답게 꾸며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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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있는 일-그들은 분별 있게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을 능력과 돈으로 바꾸었고, 절망으로 성공을 빚어냈다. 그러나 삶은 젊음과 함께 그의 사랑이 지녔던 신선함까지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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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바빌론
마지막 <다시 찾은 바빌론>은 화려했던 재즈 시대 끝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찰스 웨일스의 이야기다. 고대의 전설, 바빌론을 빗댄 당시 파리는 주식의 상승으로 물처럼 돈을 펑펑 써대던 미국인들로 가득했고 찰스도 그중 하나였다. 매일이 파티였고 술이었던 나날들을 관통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홉 살 된 딸 오노리어뿐이다. 그때 결국 아내는 죽어버렸고 주식도 한낮 종이조각이 되었다. 과거를 후회하며 재기에 성공하고 술도 끊은 그는 빼앗긴 친권을 돌려받고자 굳은 결심을 하고 바빌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시절 제부를 기억하고 여전히 경멸하는 처형 메리언과 망령처럼 그에게 매달리는 과거의 지인들 사이에서 그는 문득 깨닫는다. 이미 살아버린 세월을 다시 말끔하게 되살 수 없고, 그렇게 깨어져버린 유리조각은 결코 예전과 같이 매끈하게 붙일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그는 '방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은 기분이 들었다. 희박한 공기 사이로 사라져 버리는 것, 무언가 유(有)를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것 말이다. 늦은 밤 시각에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옮겨 다닌다는 것은 하나같이 아주 힘든 일이며, 따라서 동작이 점점 느려지는 특권에 대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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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오노리어에게 뭔가 물건을 보내 주는 것 말고는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일 여러 가지 물건을 사서 보내 주기로 하자. 그 모든 것이 결국 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자 조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언젠가 그는 또다시 이 도시에 돌아올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에게 돈을 지불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이를 원했고, 그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제 중요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혼자서 그렇게 많은 멋진 생각과 꿈을 가질 수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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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유난히 아프게 다가왔다. 남편이 혼자 해외에 나가 있는 지난 5년간, 우리가 점차 잃어간 것들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평생의 효도를 다 한다는 아이의 어린 시절을 남편은 지켜보지 못했고, 셋의 이야기는 멈춘 채 더 쓰이지 못했다. 나는 개츠비처럼 행복(그에게는 데이지라는 숙명적 사랑)이라는 초록 불빛을 얻기 위해서는 개츠비와 데이지 사이에 놓인 거대한 물(부, 성공)을 건너야 한다고 믿으며 살았다. '남편이 돌아올 때 즈음이면 조금 더 넉넉하게 여유롭게...'를 주문처럼 외우며 그 시간을 맹렬히 통과했다. 내 마음속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돌리며 모든 것을 그 뒤로 미뤘다. 그러면서 차츰 더 나를, 내가 원했던 소박하고 따스한 삶을 잊어갔다.
분명 예전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고 한결 관대하고 여유로운 삶이 가능해졌지만 그럴수록 빈한하게 비어 가는 내 안의 무언가를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 사이 썼을지도 수많은 이야기는 이제 결코 쓰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지금 그것을 쓰려고 해도 '4월'은 다시 오지 않듯이. 이 책을 두 번째로 다시 읽었던 2년 전의 어떤 날, 나는 깨달았다. 젊음도, 조금은 부족했지만 가슴 뛰는 꿈이 있던 시절도 이미 흐르는 강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붙잡아도 쉬지 않고 흘러가버릴 삶을 조금이라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
왜 지금 피츠제럴드를 읽어야 할까?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쳐왔다. 남편은 2월 초 출국한 후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모두가 많은 것들을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잃었고 어쩌면 그 삶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가 순식간에 바꿔놓은 상황을 마주하며 이제 우리 삶의 어떤 것들은 영원히 과거의 일이 되었음을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잃어왔을지도 모른다. 마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그것을 조명해 주었을 뿐.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은 전하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도 사람도 변한다. 그에 따라 우리도 결국 사라질 것이 분명하며 그 과정에서 동반하는 필연적 서글픔과 처연함이 삶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아름답고 짙은 슬픔을 담은 인물과 전개를 통해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랜 여운과 함께.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너무 아름다워 서글프기까지 한 보석 같은 다섯 편의 작품들을 통해 그것을 떠올려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골라 들었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이야기지만 지금이야 말로 피츠제럴드의 상실을 읽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 아닐까? 이번에 이 책을 다시 펼치며 근거 없는 확신을 했던 이유다. 그의 이 주옥같은 단편선을 읽으며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기를. 우리와 이 시대의 상실을 깊이 애도할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을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깊은 상실감에 젖어들어 보고 싶다면 ★★★★★
천재적 작가의 빛나도록 아름다운 재능을 느끼며 글쓰기에 자극을 받아보고 싶다면 ★★★★★
2020년 지금 현재의 내가 잃어버린 것을 떠올려 보고 싶다면 ★★★★★
삶의 진정한 가치, 소중한 것을 찾고 싶다면 ★★★★★
닥치고 가을 갬성에 퐁당 빠져들고 싶다면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의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