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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Nov 03. 2020

H의 버건디 컬러 Dior 립스틱

나를 만들었고 또 만들어 갈 아름다운 것들

대학교 1학년, 추석 연휴였는지 겨울방학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만 서울로 대학을  친구 H 집에 다니러 왔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배우 신은경을 닮은 중성적 외모에 키도 크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세련되기까지 했던 H 부산 촌놈이던 나와 Y에게 신촌의 대학생활과 거기서 알게  여러 가지 신문물(?) 전파해주고는 했다. 이미 여름방학 그녀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를 덕질 중이었는데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있을지 설레는 마음을 품고 친구를 만났다.

​H 짧은 보브컷에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청바지 차림이었고 짙은 와인 컬러의 입술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소회를 나누고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들을 펼쳤다. 덕분에 알게 된 하루키와  속에 등장하는 음악, 소설들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이미 하루키로부터 멀어진  같았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H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매력 가득한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 때문인가  몸도 그녀 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한참 대화를 이어가다 자리를 옮기기 , H 조그만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고 동그랗고 반짝이면서 매우 이국적인 물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되었을  같은 느낌의 골드와 오션블루의 조화. 투탕카멘 왕의 황금마스크 문양을 닮은  조그만 물건의 뚜껑을 열고 아래를 몇 번 천천히 돌리자 H 입술 색깔과 똑같은 색깔의 립스틱이 나왔다. 우리는(적어도 나는) 시선이 고정된 채로 그녀가 립스틱을 입술에 덧바르는 동작을 바라보았다. 비록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숨을 멈추고 감탄사를 흘리면서...

그녀가 바르는 립스틱은 무려 Dior이었다. 잡지에서만 봤던  브랜드. 숨길  없는 부러움에 우리는 립스틱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피고 뚜껑을 열어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면서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풍기는 향과 함께 H 입술에 고이 발려있는 매력적인 짙은 와인의 빛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행여나 부러질까 조심조심 보면서 물었다.

", 이거 엄청 좋네! 얼마고?"




20년도 넘은  시절, 그녀가 바른 립스틱은 요즘은 단종이 되어 나오지 않는 듯하다. 케이스는 동일하지만 파라오를 연상케 하는 오션블루색이 빠졌고 비슷한 립스틱 컬러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있다면 버건디 어쩌고 가 아닐까? 당시 90년대  갬성은 입술 라인을 따로 그리고 진한 립스틱을 바르는  핫한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한 듯  한 듯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추구하니 크게 팔리는 컬러는 아닐 것이다. 인터넷상의 가격을 보니 립스틱 컬러에 따라 3만 원 중반~ 6만 원 선에서 구매가 가능하다. 당시의 정확한 가격은 잊고 말았지만 백화점에서 2만 원대 후반~3만 원대 초반 정도였던  같다. 립스틱을   주고 산지 오래라 가격에 깜짝 놀랐다.  비싼 물건이었던 거다.

​H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나는  립스틱이 갖고 싶어 한참을 끙끙거렸다. 당시 형편으로는 선뜻   없는 물건이었지만 조금씩 푼돈을 모아 결국 백화점 1 화장품 코너에 가서  립스틱을 사고 말았다. 약간은 나른하고 더운 공기를 느끼며 반짝이고 화려한 매장  진열대에 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금빛 작은 상자를 건네받던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가끔 꺼내 바르긴 했지만 무엇보다 내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끼다 보니  컬러가 어울리지 않는 계절이  버렸고 좋던 향기도 기름 냄새로 바뀌면서 서랍 속에 모셔두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특별한 물건이었기에 선뜻 버리지도 못하고 한참을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정리했을 것이다. 어느새 서랍을  때마다 데구루루 구르는 립스틱이 눈에 띄지 않았던  보면.




살아오면서 H 비롯해 정말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쭉쭉 빨아들였다. 책도 음악도 옷과 화장품 같은 취향도 음식이나 여행 같은 경험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내가  책과 영화 속의 인물들을 포함)로부터 수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동경하고 그걸  보거나 가져보려고 하는 사이 지금의 내가 만들어져 왔다. 그중에는 H 버건디 디올 립스틱처럼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답고 멋지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 간극을 미처 깨닫지 못한  그들을, 그들의 것들을 동경하고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취사선택을 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   받아들일  있을까... 하는 기분으로 올해를 시작했다. 확고한 취향과 충분한 경험들. 이젠   채우고 덧씌우고 만들기보다는 그냥 가진    가꿔나가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작년 , 올해 초에 먹었었다. 새로운 것을 끌린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받아들이는 일은 이제 그만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그대로지만, 여전히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고 동경심을 느낄 만큼 멋진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느끼는 요즘이다. 조금씩  끌리는 데로 그것들을 따라가 보아도 좋지 않을까... 서랍  뒹굴던 립스틱이 알려준 감각 덕분에 아주 조금은  자신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 일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있을 테니까. 앞으로 남은 두 달, 그렇게 보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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