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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Jan 03. 2021

첫 외식의 추억

어린 시절,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외식은 가뭄에 콩 나듯 가끔 있는 이벤트였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 엄마가 중국집에 데려가 자장면을 사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긴 하지만 대부분 친척들 덕분에 먹어본 것이 다였다. 얼마 전 <아무튼, 떡볶이>를 읽다가 어린 요조가 경양식집에서 혼자 돈가스를 야무지게 먹는 장면을 맞닥뜨린 후, 오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렇다. 내게도 설레고 즐거웠던 외식의 추억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살던 아파트 아랫동네에는 군인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군인회 관도 자리 잡고 있었다. 면세물품을 판매하는 마트와 이발소, 목욕탕, 그리고 2층에 식당이 있었다.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가격은 바깥에 비해 획기적으로 저렴했다. 외식의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의 수준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특별한 맛과 멋을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다.   


       

명절,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특별한 빨간 날이면 늘 아빠는 혼자 또는 누군가와 산더미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산으로 훌쩍 떠나버렸기에 그런 날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평범하고 흔한 어느 저녁, 아빠와 엄마, 동생과 넷이서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처음 보는 초록의 파슬리가 먹는 것인 줄 알고 한입 베어 물었다가 낭패를 보았다. 하얗고 납작한 그릇에 담긴 크림수프에 조심조심 후추를 뿌리고 양배추에 뿌려진 샐러드드레싱을 포크고 섞었다.         


 

이어서 갈색 소스가 뿌려진 돈가스가 나왔다. 두드려 만든 슈니첼 스타일의 경양식 돈가스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어설프게 놀려가며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짭짤한 옷을 입고 기름에 튀겨진 돼지고기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했다. 맛있다는 표정과 감탄사를 내뱉자 엄마도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그 한 끼는 부담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 뒤로는 시장의 정육점에서 돈가스 고기를 사 와 직접 튀겨 주셨던 걸 보면.  

        

불현듯 그때 기억이 솟아오른 것은 처음 먹어보았던 돈가스의 맛 때문만은 아니다. 그 풍경 속 엄마가 자꾸만 떠오른다. 평소 무표정하던 엄마가 접시의 고기를 우리에게 덜어주면서 종종 웃었다. 그날 식탁 위 음식 맛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은 엄마의 은근한 설렘과 기쁨이 아니었을까? 한 끼로부터의 해방감이든 맛있는 음식에 대한 행복감이든, 아니면 우리의 들뜬 모습에 자연스레 연동한 것이든 평소의 엄마와 달랐다. 매일 이러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때의 엄마보다 열 살 가까이 더 먹은 지금에야 '나'의 즐거움에 앞서 아이를, 가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했던 반짝이는 작은 기쁨. 순간의 행복감과 함께 그 테이블 곁에 조용히 앉아 우리가 먹는 모습에 뭉클한 기쁨을 느끼셨을 엄마를 물끄러미 살핀다. 얼굴에 피었다 사라지는 수줍은 미소를 본다. 자주 부재중인 남편 대신 늘 우리를 챙기던 30대 초반의 엄마,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면서 엄마도 우리만큼 좋았구나 설렜던 거구나 바로소 알아차린다.



지나고 나서야 한참만에 소중한 존재의 다른 면면을 깨달으며 행복이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는데, 사랑이란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니었는데 돌고 돌아 멀리서 찾아 헤매고 어려운 단어로 표현하려 했음을 알 것도 같다. 여전히 한발 늦게 도착하지만 어쩌면 많이 늦은 것은 아니라고 불현듯 떠오른 어느 저녁의 풍경 속에 떠도는 은근한 미소와 기쁨의 표식들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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