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시가에 다녀왔다. 평소와 달리 저녁 대신 점심을 먹었다. 동그란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먹는데 주말 시작 전, 5인 이상 집합 금지에 대한 세부 수칙을 회람하고 온 것이 생각났다. 담당자로서 내가 수칙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남편에게 살짝 언급은 했지만 가볍게 묵살당했다.
이런 일로 갈등하는 부부들도 많을 것이다. 잠시간의 식사는 그렇다 쳐도 장례식, 결혼식이 코로나 시대라고 없을 수는 없으니까. 융통성을 봐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닌 집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기 때문에 가족 간 모임이라도 건강 상태를 잘 점검하고 음식을 덜어먹는 등 예방수칙을 잘 지키고 융통성을 가지면 되었지만 가족의 일이라면 무조건 괜찮다며 다른 의견을 유별나게 여기는 건 고쳐나가야 할 가족문화가 아닌가 싶다.
한창 식사 도중, 시누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며느라기 봤어?"
"아, 네. 예전에요.
"나 얼마 전에 봤는데 너무 재밌더라. 미혼인 아래 직원들한테 남자 친구랑 꼭 보라고 추천하고 있어."
지금 '며느라기'를 드라마로 방영 중인 모양이었다. 내가 본 건 웹툰이지만 내용은 아는데 시누가 전하는 에피소드를 들어보니 초반부였다. 나와 남편, 고모부, 그리고 어머님까지 다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 전개를 세세하게 전하시는 시누의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묘했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완전 감정이입을 하고는 했었는데.
'너는 어떤 지 잘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는 다셨지만 시누는 '우리 정도면'이란 말로 자신과 엄마(시어머니) 정도면 웹툰 속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는 자신감을 보여주셨다. 내겐 없기에 시누의 그런 부분을 좋아한다. 하지만 반대일지도 몰랐다. '네가 어떻게 생각을 하던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며느라기'속 인물들의 아이러니-다 좋은 사람들임에도 상처를 주는 일방성-을 자신의 며느라기 시절에 비춰보는 듯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시누의 자신감이 영 당황스럽지도 않았고, 시어머니는 어떨까 궁금하지 않았다. 지난 9년간 비록 웃을 일만 있었던 사이는 아니었다. 나를 상처 입히거나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지만 시누 정도면 분명 꽤 괜찮은 시누라 할 수 있다. 고마운 점, 좋은 점이 수도 없이 많다. 나도 그들의 기대치를 다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간다.
얼마 전 내 생일에 시누가 치킨 기프티콘을 선물로 보내셨다. 까먹고 있었는데 조카와 고모부가 챙겼냐고 성화를 해서 뒤늦게 챙겼다고 사연을 들려주셨다.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내 생일도 기억 안 나는데, 며느리 생일은 무슨."
그러게. 어머님이 내 생일을 챙긴 적은 별로 없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결혼 초, 가끔 팥밥을 해주셨는데 요즘은 그것도 없다.
그래도 어머님게는 꽤나 섭섭했다.매년 생신에 명절, 어버이날 챙기지 않나? 한번이라도 놓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게다가 작년 봄이었나... 내게 시누가 출근하니 대신 고모부의 생일상 차리러 오라는 전화를 하셨던 어머니다. 물론 가지 않았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구분 않고 자식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다 한다고 말씀하시는 현실의 시어머니는 이렇게 그 차이를 표현한다. 본인만 모르실 뿐이다.
어쩌면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정도면...'이라는 말은 며느리 아닌 스스로를 위해 거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현실 속 고부 갈등은 막장 드라마 속의 그것과 온도차가 있다. 그 누구도 작정하고 나쁜 사람은 없다. 일부러 먹다 남은 식은 밥과 반찬을 가져와 함께 먹자거나 딸과 아들이 웃으며 TV를 보는 동안 혼자 설거지를 하게 주방에 세워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시어머니도 사위의 생일을 챙기지만 며느리의 생일은 챙기지 않는다. 똑같이 퇴근하고 병문안 오면서 자기 좋아하는 군고구마를 사 온 며느리에게는 별말 없이 고구마 봉지를 받아 들어 옆에 치워두갔다가 이내 도착한 사위에게는 '배고프지? 군고구마 먹어라.'라고 말한다. 그렇게 차별은 은근하게 삶속에 스며들어 퍼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정서가 된다. 차별한 자가 단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며느라기’의 결말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수신지 작가가 어떤 결말을 내렸든 내 며느라기는 이제 끝나간다. 똑같이 위한다는 마음에 기대는 내려두며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감사할 일에 감사하되 과분해 하지 않고,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과 어머님의 말과 행동에 연연하지 않는다. '우리 정도면'에 현실 차를 느끼며 종종 서운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그들의 마음도 진심이었을 것을 헤아려가며 상처를 점점 덜 받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