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사분면의 삶 1
휴직 의사를 밝히고 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있었지만 휴직 개시 직전에야 겨우 후임이 정해졌다. 결정이 있은 다음날 그분은 연차를 갔고, 주말이 오고 삼일절 지나 바로 나의 휴직이 시작되었다. 자연스레 인수인계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처음에 비해 연락 오는 횟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연락이 오고, 답을 해주거나 메일을 확인하고 후속처리를 해 주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꽤나 들이고 있다.
그래서인가? 아직은 회사를 다니는 기분이다. 매해 남편 만나러 아이와 다녀왔던 여행들처럼 잠시 사무실을 떠나 긴 휴가를 떠나와 있는 느낌이랄까? 복귀하면 원래 부서가 아닌 본부로 들어갈 거라는 예측이 우세하지만 그 자리에 다시 가든 아니든 잘 인계해 주어야 할 일이다. 다행히 후임이 경험자라 한결 마음이 놓인다. 어렵다기보다 귀찮은 일이 잦은 지원성 업무라 몇 번 해 보면 그럭저럭 해나가실 것 같다.
마음 한편, 오롯이 휴직의 시간을 누리고픈 시간을 방해받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아 들고, 어떤 업무에 대한 의견차로 처리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때, 분명한 이유를 설명해 주면서도 성향상 비판을 신경 쓰고 마는 성격이다 보니 잠시 마음의 평화로움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업무가 1년 루틴으로 돌아가니 휴직 내내 이런 연락을 주고받게 될 것 같다. 차차 서로 적응해가지 않을까? 나도 그러면서 조금 더 편해질 것이다.
아직 회사를 떠나왔다는 실감이 크지 않으면서도 '왜 그 좁은 우물 안에서 아등바등 살았나?' 지난 시간이 웃퍼서 다시 돌아갈 시간이 막막한 건 부인하기 어렵다. 늘 우물 저 아래쪽에서, 더 좋은 먹이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보다 좁은 하늘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언젠가는....?' 꿈꿨던 시간이 바로 지금인데, 오는 연락과 돌라갈 시간에 사로잡히다 보면 그 우물 속에서 부대끼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세팅된다. 불안하다. 파블로브의 개처럼 조건반사다.
어제는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전화가 계속 울렸다. 끊기다 울리고 또 끊기다 울리고... 레슨 끝나고 혼자 연습 중이었는데 연습 시간 20분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아쉬워서 전화를 무시하고 피아노를 쳤다. 회사 말고 전화 올 곳도 없었다. 건반을 더듬더듬 쳐 나가면서 머릿속으로 '무슨 급한 연락일까?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망설였다. 이내 머리를 흔들면서 연습에 집중하려 노력했고 이겨냈다. 20분을 채우고 레슨실을 나섰다.
연습 끝나고 레슨 등록 마치고 학원을 나와 전화기를 확인하니 카톡으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사진이 여럿 찍혀 있었고 멘트는 생략. 알아서 답해달라는 것 같았다. 불요불급한 사안이어서 그때 확인하고 대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긴, 지금 부서에서 내가 맡았던 많은 일들도 대부분은 맹수에 쫓기듯이 서두를 일은 아니었는데 늘 다그치는 부서장의 기분과 대우를 지나치게 신경 쓰며 전전긍긍해 왔던 건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 이제 막 고민의 시작 단계에 접어들어 섣불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처럼 얻은 긴 방학 동안 해 보고 싶은 몇 가지가 있는데 우물 안에서 늘 꿈꾸던 하늘을 보러 나서는 길을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눌러왔던 욕구가 터져 나온 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삽질이라도 시작해야 뭐라도 시작되지 않겠는가? 그게 무엇이든 씨를 뿌려둔 밭에는 언젠가 무엇이라도 자라는 법이니까.
만약 열심히 씨를 뿌렸어도 <미나리>의 제이콥처럼 희망 바로 앞에서 주저앉는 일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며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결코 그 이전과 다를 것이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은 결코 편안할 리 없고 비통하겠지만 실패나 타협과 다른 걸음을 걸을 수 있다고 믿어볼 것이다. 그게 무서워 늘 편안하게 우물 안에서 꿈만 꿔온 스스로에게 '지금이 그때야!'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