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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특별 주문 케이크가 필요할 때

<특별 주문 케이크> 박지윤 글그림, 보림

지금도 생각나는 내 인생의 케이크가 있다면, 고등학교 때였을까? 평소 무뚝뚝하시던 아빠가 내 생일에 궁전제과에서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사 오셨다. 윤기 나는 과일들이 듬뿍 얹혀있던 화려한 케이크에 마음이 설렜다. 평소 케이크를 좋아하진 않지만, 마음에 달콤함이 필요할 때면 일 년에 2~3번은 꼭 ‘달콤 화이트 초코케이크’를 사 먹는다. 달콤한 케이크가 한 숟가락씩 입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내 마음은 다시 어린 시절의 분홍 솜사탕이 된다.     


특별나게 따뜻하고 예쁜 그림책 <특별 주문 케이크>를 쓰고 그린 박지윤 작가도,

“반짝이는 날에는 케이크를 먹어요. 삶의 반짝임은 기쁨과 성취와 사랑에도 있지만, 상실과 그리움의 시간에도 있어서 (…) 그런 날에는 예쁘고 맛난 걸 먹으며 케이크 한 조각만큼의 명랑한 마음을 되찾고, 다시 힘내서 하루를 지내고 다른 날을 기다립니다.”라고 했다.     


올해도 우리 도서관에서는 도심(독서심리치유연구회) 회원들과 중년 성인과 어르신 대상으로 그림책테라피를 진행했다. 나도 독서심리상담사로서 한 회차를 맡아 준비하고 진행했다. 마지막 회차에 적합한 그림책을 찾기 위해 서점에서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다가, 겨우 찾은 책이 박지윤 작가의 <특별 주문 케이크>였다. 은방울꽃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꽃밭을 총총거리며 지나가는 비둘기 아주머니가 그려진 단아한 그림과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봤더니, 이웃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보듬고 그들의 삶을 지지해주며 살아가는, 노년의 성숙한 자아통합감이 누구보다 잘 이루어진 비둘기 할머니의 일상이 그려져 있었다.      


숲속, 커다란 떡갈나무에 사는 비둘기 할머니는 날마다 독특한 사연이 담긴 특별 주문 케이크를 만드느라고 바쁘다. 월요일에는 곰 아저씨의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시끄럽게 떠드는’ 꼬마 생쥐를 위한 생일 축하 초콜릿케이크를, 화요일에는 토끼 소녀를 짝사랑하는 토끼 소년의 고백을 위한 당근꽃 케이크를, 수요일에는 달리기 시합에 참여하는 달팽이를 위한 이끼 케이크를, 목요일에는 다람쥐와 족제비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도토리․나무딸기 케이크를, 금요일에는 고양이 남매의 ‘엄청 맛있고 엄청 멋있는’ 어버이날 축하 생선 케이크를, 토요일에는 레트리버 할아버지의 아픈 친구를 위한 북어 뼈다귀 케이크를 굽는다. 일요일에는 친구 올빼미 할머니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달빛이 은은한 나무 위에서, 지렁이가 듬뿍 들어간 나무딸기 케이크를 먹으며 일주일을 마무리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책이다. 이웃들의 각자 독특한 사연이 담긴 케이크를 만들면서, 케이크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오직 그 대상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면서 그 대상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비둘기 할머니를 보면서 올 초에 도서관에서 진행했던 ‘인간중심상담’ 심리학 강좌가 떠올랐다. 비둘기 할머니는 숲속 마을의 따뜻한 심리상담사였고, 서로의 관계를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정신적 멘토였다.      


인간중심상담은 칼 로저스(1902~1987)에 의해 발전된 인본주의적 심리치료로서 긍정적인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 인간중심치료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다. (…) 치료자의 역할은 내담자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향을 지지하기보다 내담자의 실현 경향성이 촉진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 이러한 조건만 주어지면 내담자는 직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내면적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 이론> p.271     


칼 로저스는 인간중심상담에서 치료자의 중요한 태도로 내담자에 대한 ‘긍정적 존중’, ‘공감적 이해’, ‘진솔함’을 말하고 있는데, 비둘기 할머니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는 이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깃들어있었다. 문득 비둘기 할머니의 젊은 날이 궁금해졌다. 젊은 날의 그 많은 눈물과 한숨을 어떻게 삶의 기쁨과 행복으로 잘 버무려 오셨을까? 이 순간 비둘기 할머니는 나의 정신적 멘토가 된다.       


서서히 중년의 끝자락으로 멈칫멈칫 걸어가고 있는 나는,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노년’의 삶이 두렵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점점 짙어지는 입가의 주름살, 언뜻언뜻 흐려지는 눈, 점점 약해지는 몸의 기능 따라 늘어나는 여러 종류의 알약이 당연한 나이가 되면서, 어떤 노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세월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독서심리상담을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수용’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긍정적으로 현재의 나를 수용하고, 내 삶을 지지하는 그 순간부터 내 삶의 멋진 자아통합감은 시작된다.      

눈 내린 겨울밤, 총총한 마음으로 비둘기 할머니에게 특별 주문 케이크를 신청하고 싶다.

<특별 주문 케이크 신청서>

즐거운 상상력과 삶에 담대할 수 있는 용기가 쑥쑥 자라는 케이크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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