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밤을 끝내다
오늘은 팀장님의 클라이언트가 내방하는 날.
팀 개편으로 그 프로젝트를 함께한다는 인사를 겸했다.
오후 미팅이 끝나자 자연스레 저녁 회식으로 이어졌다.
자리는 삼겹살. ‘을’의 막내인 내가 집게와 가위를 들었다.
분위기를 이끄는 쪽은 클라이언트 차장. 명함을 확인한 그는 반가움을 과하게 표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과장님. 한 잔 받으시죠.”
그는 자신의 잔을 비우고, 닦고, 내 손을 감싼 채 소주를 따랐다.
불필요한 접촉.
“네, 잘 부탁드립니다.”
주는 잔을 그대로 받았다. 딱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화는 금세 외모 이야기로 미끄러졌다.
“키도 크시고, 분위기도 좋으시고…”
나는 의례적으로 웃었다.
“평범해서 잘 안 보이는 편이에요.”
“같이 일하려면 좀 친해져야죠. 한 잔 더.”
빠르게 오가는 잔들, 틈틈이 날아드는 외모 언급을 포함한 부적절한 관심표현.
여러 모로 불편했고, 술기운이 오르며 머리가 붕 떴다.
그런데—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함이 번졌다.
좌식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놀라움과 수치가 한꺼번에 치밀었지만, 자리는 그대로 흘렀다.
나는 자리를 조금 옮겼다. 차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술을 권했다.
“결혼은…? 남자친구는…? 없으시면 제가 소개를…”
부장님이 대신 대답했다.
“미혼이에요.”
나는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거울 앞에서 떨리는 숨을 고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같은 일이 더 반복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능한 한 멀찍이 비켜 앉는 것뿐.
1차가 끝나고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갑’의 성화로 2차가 성사됐다.
상사들도 “막내가 먼저 가긴 어렵다”는 공기였다.
2차에서도 그는 나를 따라 나와 팔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함을 가장한 불필요한 접촉으로 거리를 좁혔다. 끝내 부장님이 취한 나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다음 날, 그의 메시지가 왔다.
“잘 들어가셨나요, 과장님. 조만간 한 잔 더 해요.”
손이 떨렸다. 나는 짧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요즘 많이 바빠서요.”
이후에도 몇 번 연락이 왔다. 그가 어느 날 회사를 올까 봐, 업무 전화라도 받을까 봐 긴장했다.
다행히 그는 곧 다른 부서로 발령 났고, 나는 번호를 차단했다.
그 시절 사무실에는 이런 공기가 흔했다.
은근한 성희롱 농담, 여직원의 당연한 술 따르기, 상석 옆자리의 젊은 여직원 앉히기, 술자리에서 억지로 블루스를 시키는 구태.
나는 대개 참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러나 그날의 접촉은 선을 넘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
증거는 내 말뿐.
그리고 그는 ‘갑’이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매출을 걱정하는 회사가, 나 하나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내가 조용하면 그냥 지나가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은 오래 남았다—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아무 행동도 못 한 나를 오랫동안 탓했다.
피해자였던 나를 위로하기보다, 나약했다고 먼저 책망했다.
그래서 끝내 나는,
피해자였던 나를 자책만 하고 보듬어 주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명백히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었고, 내게는 안전이 우선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건네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다.
“그럼에도 잘 버텼다. 네 잘못이 아니다. 다음엔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
그날 이후, 나는 나의 경계선을 조금 더 분명히 그리기 시작했다.
참 별 걸 다 버텨냈다.
그래도—버틴다는 건, 결국 나를 지켜 줄 ‘나’를 단단히 세우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