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진화 아닌 진화
나에게 글쓰기란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내 감정을 내보내는, 일종의 배출구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니 거의 전부는 소위 땅굴파기 식. 혹은 나와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는, 그런 것들에 대한 혼자만의 뭉실뭉실한 생각을 끄적인 글. 그 일례로 브런치 서랍에 숨겨놓았던 글을 하나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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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자유에 대해 고민하던 때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삶'에 대해 알게 된 후 썼던 글이다.
자기의 것이 아니지만 왜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낙타의 삶'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율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정도의 소극적 자유만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자의 삶'
그리고 어떠한 억압과 구속에도 불구하고, 순진무구하게 갈등과 편견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어린아이의 삶'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첫째로,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잊히기 마련인, 그 순간에만 가질 수 있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기록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오늘' 힘내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어느 누구 한 명에게는 공감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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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하지만 짊어져야 하는 다른 이의 짐. 1년 전의 나는 그것에 순응하는 낙타였다. 24시간 365일 풀 독박 육아. 그리고 그것과 생계를 위한 일과 살림의 병행. 남의 도움 없이는 20분 가만히 앉아서 밥 먹는 기본 욕구 하나 마음 편하게 충족하기 버겁던 나는 어쩌다 사자가 되어버린 걸까.
니체는 그것이 한 단계 진화라 표현했다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날뛰는 한 마리 짐승에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더 이상 감정을 숨기는 장치를 잃은 것처럼 한 줌의 제어 없이 날 것 그대로의 그것을 퍼부어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난, 아니 우린 '하루'가 어린이집에 간 이후로 바람이 멈춘 줄로만 알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 저 깊은 끝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불안과 분노가 이끄는 폭풍이. 얕게 숨 쉴 정도의 틈, 그걸로 나는 바쁘고 가쁘지만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몇 개월간 끊임없이 살 구멍을 파대는 지렁이 마냥 참 야무지게도 움직였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는 1시간의 개인 시간도 사치였던 6월, 나는 갑자기 1년 치 운동을 끊었다. 8월에 '하루'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프리랜서가 되었고, 내친김에 차까지 질렀다. 그리고 7월에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만남을 인연으로 이어내 겸업 제안을 받기에 이르렀다.
회사, 집, 회사, 집... 주말엔 집 앞 쇼핑몰 심지어 그 모든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하던 내가,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그리고 어쩌면 경제적 여유까지) 순식간에 얻어낸 것이다.
그렇게 다 좋은 게 좋은 거, 나쁜 것도 언젠간 흘러가지라는 느낌으로 다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왜지. 왜 말도 안 되는 포인트에서 터져버린 걸까. 짜증 섞인 "안 일어날 거야?"란 한 마디. 우린 시간에 흘려보내기만 했을 뿐 제대로 그 매듭을 풀려고 하지 않아서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건은 잊혀도 감정은 남는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피도 눈물도 없이, 정 없이 가족도 끊어냈던 나는, 아마 이 일련의 일들을 아니 이 일련의 감정 소용돌이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도 그럴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로 꼬리 끊어내기의 고수. 동아줄의 윗줄을 그렇게 단칼에 끊어냈던 것처럼, 내 팔 한쪽도 그렇게 잔인하게 끊어내게 될까. 나는 언제쯤 낙타와 사자를 넘어서 '하루'와 같은 온전한 자유를 가진 어린아이가 될 수 있을까.
*2018년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