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 날_에피소드 2
From Mom's Heart
MoMA 미술관을 찾은 오후,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욱신거리는 무릎 통증에 더 이상 발을 내디딜 수 없었고, 결국 의자에 앉아 쉬어야 했다. 미술관 한가운데서, 나는 점점 내 몸이 나를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프다는 것보다 더 서글펐던 건, 그렇게 정지된 나를 두고 앞서 나가는 시간이었다.
반면, 딸아이는 미술관을 가득 채운 그림들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였다. 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며, 그녀는 그림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모네의 수련을 마주한 순간, 아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연신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엄마, 이런 감동은 처음이야.”
그 한마디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저 자리에 앉아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은 반짝였고, 그 속에는 그림이 주는 벅찬 감동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갈 수 없었다. 몸이 아닌 마음만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순간은 오롯이 그녀만의 것이어야 했던 건 아닐까?
내가 옆에 서 있었다면, 딸아이는 나를 신경 쓰느라 온전히 그림과 마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위해 설명하려 했을 것이고, 감상을 나누려 애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딸아이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그림과 마주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딸아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통증을 느꼈지만, 아이는 감동을 느꼈다.
나는 아쉬움을 안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미술관을 나오는 길, 딸아이는 여전히 모네의 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엄마, 모네는 이걸 그릴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모네가 그렸던 순간들, 그의 눈앞에 펼쳐졌던 수련 연못, 그리고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는 이 연못을 정말 사랑했겠지.”
“매일 바라보고, 빛이 바뀌는 걸 보고, 물결이 일렁이는 걸 보면서, 그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딸아이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그러다 다시 말했다.
“그럼, 이걸 그리면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슬펐을까?”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모네는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세상은 흐려지고, 뿌옇게 번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고 싶은 것을 그려냈던 것이 아닐까.
“행복했을 거야. 하지만 어쩌면, 조금은 애틋하기도 했겠지.”
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중한 것들은 항상 곁에 머물러 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간절히 담아두고 싶었을지도 몰라.”
딸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을 빠져나와 바람이 스치는 길을 걸으며, 나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문득, 오늘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도 언젠가 기억 속에서 흐려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흐려짐이 꼭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모네가 마지막까지 수련을 그려냈 듯, 우리도 지금 이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니까.
Through Daughter's Eyes
더 오큘러스에서 나와 버스로 이동하던 중, 가이드님이 갑자기 MoMA 미술관에 추가 방문할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셨다. 원래 엄마와 나는 미술관을 들를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가이드님께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다고 하셨다.
'별이 빛나는 밤'은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작품이었다. 뉴욕에 다시 올 기회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놓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엄마를 졸라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미술관에 도착하자, 로비는 외관보다 훨씬 넓고 세련돼 보였다. 깔끔한 화이트 톤의 배경에 곳곳에 조각상들이 놓여 있어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미술관의 디자인을 둘러보며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MoMA 내부는 마치 미로 같았다. 네모난 방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각 방 안에는 또 다른 전시 공간이 있었다. 방탈출 카페처럼 복잡한 구조 속에서 나는 오직 '별이 빛나는 밤'을 찾느라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방마다 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급한 마음에 번호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MoMA에는 고흐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았지만, 몬드리안과 앤디 워홀의 그림 등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보았던 익숙한 작품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처음에는 '별이 빛나는 밤'을 보기 위해 서둘렀지만, 익숙한 작품들을 마주할 때마다 걸음을 늦추며 감상했다. 마치 명작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한 전시실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한 작품 앞에 줄을 서 있었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모습을 보고, 나도 놓칠세라 급히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내가 간절히 보고 싶었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주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았다. 깊고 푸른 밤하늘 위로 노란 별들이 소용돌이치듯 빛나고 있었다. 거친 붓 터치 속에서도 신비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수많은 인파와 플래시 세례에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사진을 찍은 후 그림 앞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미술관 로비로 나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다 둘러보았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박물관의 홍보 책자를 구경하던 나는 한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박물관의 대표작들을 소개하는 글 중에 모네라는 이름이 보인 것이다. 여러 화가들 중에서도 모네는 나에게 특별한 인물이다. 영어 독해책을 풀던 중에 인상주의에 대한 지문이 나왔었는데, 그곳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화질이 별로 좋지 못한 독해 지문의 자료였는데도 나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하늘한 수련꽃이 마치 물 위에서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후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묻는다면 항상 '모네의 수련'이라고 답했다. 그런 작품이 지금, 바로 이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엄마와 로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다급히 모네의 그림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미술관을 한 바퀴 다 돌았음에도 모네의 그림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복잡한 구조 때문이었다. 몇 개의 방을 빼놓고 지나쳤던 것이다. 두 번째로 전시관을 다시 돌며 찾아본 끝에, 드디어 '수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그 규모에 놀랐다. 방의 세 벽면을 거의 덮을 만큼 거대한 캔버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초록빛 같기도 하고 하늘빛 같기도 한 배경 위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야리야리한 수련들이 고요히 떠 있었다. 파스텔 톤의 색감, 잔잔한 물결, 생동감 있는 꽃잎과 세밀한 디테일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방 안에는 1~2명밖에 없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미술관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별이 빛나는 밤'으로 시작해 '수련'으로 끝난 MoMA 미술관 방문.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