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 날_에피소드 1
From Mom's Heart
여행 둘째 날 아침, 대부분의 여행사가 그러하듯이 뉴욕 맨해튼의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뉴욕 맨해튼의 호텔들은 숙박 요금이 비쌀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세금과 비용 부담도 상당하다. 뉴욕시에서 부과하는 호텔 숙박세는 높은 편이며, 이로 인해 전체 여행 경비가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뉴저지에 있는 호텔에 머물게 되었는데, 예상보다 쾌적한 환경에 만족감을 느꼈다. 뉴욕의 복잡한 분위기와 비교하면 뉴저지 호텔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여유로웠으며, 객실 공간도 넓었다. 특히 조식이 훌륭해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요소들은 여행의 피로를 덜어주었고, 일정이 길어질수록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교통 문제만큼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뉴저지와 뉴욕을 오가는 과정에서, 나는 두 번의 강렬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중 첫 번째 감정은 짜증이었다. 아침 일찍 뉴욕으로 이동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동 중이었다. 출근하는 직장인, 관광객, 학생들까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고, 교통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홀랜드 터널을 통해 뉴욕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극심한 정체에 갇혔다.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속에서 느낀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는 몇 미터 움직이다가 다시 멈추고, 신호가 바뀌어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뉴욕을 향하는 출근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인내심을 시험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뉴욕에 갈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두 번째 감정은 체념이었다. 뉴욕에서 하루 일정을 마친 후, 다시 뉴저지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시간이 되었다. 결국 우버택시를 선택했지만, 요금이 상상 이상이었다. 아침부터 겪었던 교통 정체도 짜증 났지만, 이렇게 비싼 택시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의 교통 체증과 높은 비용에 대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활기찬 도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고, 거리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간다. 이런 뉴욕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단순히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맨해튼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고층 빌딩 전망대에 오르거나, 도시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을 타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 배에 올랐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던 유람선이 점차 ”리버티 아일랜드(Liberty Island)를 향할 때,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의 가치관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 거대한 동상은 1886년에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외교적 선물을 넘어선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보았던 것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그들에게 이 거대한 동상은 새로운 삶과 기회의 시작, 그리고 자유에 대한 희망을 상징했다.
비록 나와 딸아이는 그 웅장한 동상과 함께 한 장의 사진에 담기기 위해 여러 번 사진을 찍는 수고에 집중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깊은 역사와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길 여유도 없이, 우리는 가장 좋은 각도를 찾기 위해 자리를 바꾸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며, 조금 더 잘 나온 사진을 위해 다시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찍은 사진 속에는, 단순한 관광 기념사진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곳에서 함께 한 순간, 우리도 이 도시에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곳을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사진을 확인하며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유람선은 단순히 자유의 여신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지나자, 이민국이 있던 엘리스 섬(Ellis Island) 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내 방송이 울리며, 과거 이곳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온 이민자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전해졌다. 미국인들에게 엘리스 섬은 "아메리칸드림"의 출발점이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곳을 거쳐 갔다. 자유의 여신상이 저 멀리 보이는 그 순간, 많은 이민자들은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엘리스 섬은 자랑스러운 과거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빈손으로 도착했지만, 결국 미국 사회에 자리 잡고 번영을 이루었다는 역사. 그들에게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엘리스 섬의 의미는 사뭇 달랐다. 한국인들에게 이민이란 종종 "선택"이 아닌 "필요"였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은 주로 전쟁과 가난을 피해 떠났다. 1900년대 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떠난 한국인 노동자들이 있었고, 1960~70년대에는 미국의 노동 이민 프로그램을 통해 의사, 간호사, 기술자로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민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미국 이민이란 단순한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엘리스 섬을 통과한 유럽 이민자들이 문화적 유사성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피부색과 언어 장벽, 차별이라는 또 다른 벽을 마주해야 했다.
더욱이, 1924년 미국의 이민법이 아시아계 이민을 사실상 차단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출신들은 공식적으로 미국 입국이 어려워졌다. 이민자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이지만, 모든 이들에게 열린 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엘리스 섬은 미국인들에게는 조상들이 꿈을 찾아 도착한 희망의 섬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쉽게 닿을 수 없었던 낯선 문턱이었다. 나는 엘리스 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00년 전,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저 문을 통과했을 때, 같은 시대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지배 아래에서 미국으로 떠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간호사나 미군과 결혼한 전쟁 신부들이 제한적인 기회 속에서 미국 땅을 밟았다. 과연 엘리스 섬은 누구에게나 "기회의 문"이었을까? 그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같은 공간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람선이 다시 맨해튼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고, 자유의 여신상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동상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이민의 역사 속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유와 기회의 상징"이었지만, 그 자유와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말, 수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은 새로운 삶이 시작될 신호였고, 엘리스 섬은 아메리칸드림의 문턱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쉽게 닿을 수 없는 땅이었다. 과거에는 인종별 이민 제한이 있었고, 지금도 미국의 이민 정책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누군가는 기회를 잡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한다. 뉴욕은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다. 그러나 이민을 둘러싼 논쟁과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엘리스 섬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뉴욕의 바다 위에서, 이민과 자유, 그리고 한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뉴욕은 여전히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도시였다. 그것이 기회이든, 벽이든.
Through Daughter's Eyes
나에게 여행 둘째 날은 꿈을 이룬 시간이었다. 뉴욕에는 수많은 상징적인 장소들이 있다.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 파크 등. 사실 뉴욕에 도착한 첫날에는 이런 공간들을 한 곳도 가지 못했다. 뉴욕의 분위기를 느끼긴 했지만, 나에게는 좀 아쉬운 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이 아쉬웠다. 그래서 둘째 날, 처음으로 보러 간 자유의 여신상은 내게 큰 설렘을 주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허드슨 강에 위치한 리버티 섬에 세워져 있다. 사실 나는 자유의 여신상이 구리로 된 조각상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섬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람선을 타고 접근했을 때 리버티 섬이 거대한 조각상을 간신히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가까이 볼 때와 멀리서 볼 때 느낌이 좀 다르다. 멀리서 보면 일단 그 엄청난 크기에 놀라게 된다. 높이가 93.5m나 되는데, 거리감을 감안해도 엄청난 규모였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 디테일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자유의 여신상의 옷자락의 주름부터 손가락의 형태, 팔꿈치의 굴곡,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독립선언서까지 매우 섬세해서 정말 놀랐다. 자유의 여신상의 제작 시기가 1886년이라고 하던데, 그 시기의 조각 기술이 이렇게 까지 정교했는지 정말 놀라웠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자유의 여신상의 제작 과정을 검색해 보았다. 이 동상은 내부 구조를 먼저 작업한 후, 얇은 구리판을 목재로 된 단단한 거푸집 속에 넣고 망치로 두드려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납땜과 못으로 긱 부분을 이어 붙여 완성되었다.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한 것이지만, 이에 얽힌 웃픈 사연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동상 제작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판매하고 디너파티 등의 여러 이벤트를 했다. 하다못해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동상의 머리 부분을 전시해 추가 기부금을 모으기도 했다. 반면, 받침대 부분 건설을 담당했던 미국은 동상의 본체가 완성된 후에도 자금 부족으로 설치를 미루기도 했었다. 이때, 당시 신문사 뉴욕 월드의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가 적극적인 모금 캠페인이 펼쳤고, 미국 시민들의 기부가 이어지면서 마침내 받침대 건설이 가능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합력으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자유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꼽힌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록펠러 센터였다. 이곳은 미국 맨해튼의 풍경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는 전망대인데,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미국 여행 전에 남산 타워에 가본 적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곳과 록펠러 센터를 비교하게 되었다. 두 곳 모두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간다. 너무 높은 곳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다 보면 일반 엘리베이터와 달리 움직이는 느낌을 잘 느낄 수가 없다. 남산 타워의 엘리베이터는 영상과 음악을 제공하지만, 영상이 천장에서만 재생되기 때문에 위치상 영상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공간에 나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록펠러 센터는 달랐다. 록펠러 센터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동안, 바닥을 제외한 엘리베이터의 모든 면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뉴욕과 록펠러 센터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공간을 커다란 영상과 음악이 가득 채우며 올라가는 경험은 정말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4D 영상을 감상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전망대는 온통 깜깜했다. 모든 통창을 검은 커튼으로 가렸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린 직후, 직원이 커튼을 한순간에 걷어 올렸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높이에 아찔했지만, 위를 올려다보면 여전히 더 높은 건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이게 진짜 뉴욕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전면 통창으로 된 원형 전망대를 따라 걸었는데, 손으로는 바쁘게 카메라를 움직이면서도 입에서는 탄성이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록펠러 센터에서 내려다본 뉴욕의 풍경은 화려했다.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의 일상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뉴욕의 모든 건물은 회색빛이었다. 어느 하나 눈에 띄는 색깔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뉴욕을 화려하지만 어딘가 외로운 도시라고 느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록펠러 센터가 소개되었다. 그런데 화면 속 록펠러 센터에는 내가 방문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액티비티들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뉴얼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화면 속 액티비티들이 정말 재밌어 보여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그라운드 제로였다. 이곳은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9·11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록펠러 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 그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쌍둥이 빌딩 자리를 그대로 살려서 그런지 그라운드 제로는 거대한 사각형의 모양인데, 검은 마감재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는 영원히 끊임없이 흐르는 폭포가 있었다. 이 폭포는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들의 부재를 표현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물의 흐름은 삶의 연속성과 기억의 지속성을 나타내며, 방문자들에게 잠시 묵념을 할 시간을 준다. 그라운드 제로 외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유족과 지인들이 놓아둔 하얀 꽃이 곳곳에 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메모리얼 뮤지엄도 함께 있는데, 당시의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방문객들이 이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도록 만들어졌다. 특히 그림 한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길이가 5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대형 작품이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림에는 흘러내리는 듯한 물과 파란 배경이 있었는데,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희생자들의 절규와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라운드 제로는 정말 딱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것. 내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여러 공간 중에서 이렇게까지 담백하면서 목적에 충실한 공간은 그라운드 제로뿐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를 나와 향한 곳은 더 오큘러스였다. 이곳은 미국의 복합 쇼핑몰로, 점심을 먹기 위해 방문했다. 더 오큘러스는 야자수를 이용한 이국적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쇼핑몰 내 식당가에는 타코, 포케, 피자 등 다양한 음식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엄마와 나는 페퍼로니 피자와 아보카도 보울을 선택했다. 보울 요리는 다양한 재료를 밥 위에 얹어 먹는 형태로, 미국식 서브웨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재료부터 소스까지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어 꽤 매력적인 음식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쇼핑몰의 창문으로 본 뉴욕은, 오후의 나른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