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섯째 날
From Mom's Heart
어느덧 딸과 여행을 떠난 지도 엿새째. 일정이 길어질수록 몸은 피곤해졌고, 머릿속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처음엔 설렘으로 가득했던 아침들이 어느새 습관처럼 시작되고 있었고, 이날 아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소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은 제법 매서웠고, 마음마저 쌀쌀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그냥 버티는 하루가 되겠구나’ 싶은 기분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천섬(Thousand Islands)'이었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세인트로렌스 강 위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들. 이름은 그럴싸했지만, 실상은 크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섬들이겠거니 싶었다. 배를 타고 강 위를 도는 일정이라니, 차라리 버스에 앉아 눈을 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무심히 올라탄 유람선이 잔잔한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경은 달랐다. 아니, 전혀 달랐다.
강 위에 흩어진 섬들은 정말 ‘천 개’라도 될 듯했다. 어떤 섬은 새 한 마리 겨우 앉을 법한 크기였고, 어떤 섬엔 울창한 나무와 고즈넉한 집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었다. 섬과 섬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거울처럼 맑았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그림자마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하트 아일랜드(Heart Island)’였다. 섬 이름처럼 하트 모양을 닮은 이곳엔, 고딕풍의 아름다운 성, 볼트 성이 우뚝 서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성은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성이 완성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남자는 공사를 중단한 채 그대로 성을 떠났다고. 수십 년간 버려진 채 강바람을 맞던 그 성은 훗날 다시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나는 잠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으로 연신 창밖을 찍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저 아이에게도 언젠가 이런 사랑 이야기를 품은 장소에서 추억을 만들 날이 오겠지.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엄마와의 이 여행이 작은 조각처럼 남아 있기를, 조용히 바랐다.
딸은 두 섬 사이에 놓인 좁은 다리를 보고는 내 손을 끌며 말했다.
“엄마, 저게 바로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국제 다리래!”
실제로 그 다리는 미국 땅과 캐나다 땅을 연결하는 다리로, 불과 몇 걸음이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는 그 사실에 신이 났고, 나 역시 아이처럼 웃었다. 피곤했던 몸과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천섬은 그저 자연이 만들어낸 예쁜 풍경 그 이상이었다. 이야기와 전설, 사랑과 기다림이 얽힌 공간. 예상치 못한 감동이 천천히 스며드는 곳이었다.
배가 선착장으로 돌아올 즈음, 딸은 나직이 말했다.
“엄마, 오늘은 정말 기억에 남을 것 같아.”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키지 여행이라 일정은 정해져 있었지만, 마음까지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 천섬은 우리에게 예정에 없던 감동을 안겨주었다.
돌아가는 길, 딸의 손을 꼭 잡고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은 참 고마운 하루였네.”
Through Daughter's Eyes
오전에 토론토에서 천섬 유람선을 탔다. 천섬은 미국과 캐나다 사이 세인트로렌스 강에 위치한 약 1000개의 섬을 묶어 이르는 지역으로, 나이아가라와 비슷하게 섬마다 국적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섬안에 2개의 국적이 다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휴전선으로 완전히 끊어진 북한을 제외하면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신기했다. 천섬의 섬이 되려면 위의 3가지의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먼저 면적이 2제곱미터를 넘겨야 하고 일년 내내 물 위에 떠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소 한 그루 이상의 나무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마지막 조건이 좀 웃겼다. 나무가 섬의 기준이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천섬은 강에 떠있는 지역이니만큼 유람선을 타야지 구경할 수가 있다. 이미 미국의 가을같은 선선한 날씨에 길들여진 나는 뭣도 모르고 당당하게 유람선의 맨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10분만에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캐나다는 미국과 정말 다른, 추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날에 유독 쌀쌀하기는 했으나 10월인데도 불구하고 입김이 나오고 코가 빨개지고 손이 정말 어는 줄 알았다. 심지어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날씨였다. 바람이나 다른 기후의 영향없이 그저 기온 자체가 낮은 건데,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어쨌든 천섬에는 정말 크고 작은 섬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있었다. 화려한 저택과 정원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달랑 나무 한 그루, 움집(과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 하나처럼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부분도 있었다. 천섬의 대부분은 부자들의 세컨하우스 정도로 이용된다는 데, 저렇게 작은 섬에 저렇게 작은 집이 있다는 점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천섬이 춥기는 했어도 캐나다의 단풍과 함께 보니까 절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고층빌딩 또는 빌라에 익숙해진 나로써는 이런 자그마한 아기자기한 섬들이 정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레이저 빔을 맞고 축소되어서 미니어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레이저빔의 마법이 풀리고, 다시 확대되어서 유람선을 타고 돌아올 때는 천섬이란 곳을 알게 되어 기쁘면서도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멀어지는 게 씁쓸하면서도 아쉬운 기분이었다.
토론토를 빠져나와 간 곳은 몬트리올이었다. 몬트리올은 한번쯤은 들어봤던 캐나다의 도시로 과거 영국에서 지배를 당해 반영감정이 상당하다고 한다. 어떤 정도냐면 몬트리올에 세워진 영국 넬슨 제독의 동상은 너무 만힝 훼손되어 동상의 높이를 엄청 높였다고 한다. 이렇게 몬트리올의 시내와 구시가지를 둘러보다가 오후에 점심식사를 했다. 캐나다의 특산물인 랍스터를 먹었는데, 맛있으면서도 아빠랑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아까 얘기했던 넬슨제독의 동상이 있는 다름광장이었는데, 거기서 버스킹을 구경했다. 내가 생전 처음보는 악기들을 가지고 공연했는데, 사실 노래가 좋았다는 것만 기억하지 그 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인상에 남았다. 바로 버스킹을 대하는 캐나디안의 태도이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좋은 노래를 듣자마자 바로 핸드폰부터 꺼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는 달랐다. 캐나다에서도 촬영하는 시민들을 여럿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들의 음악을 즐기고 공감해 주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지나가다 우연히 본 버스킹 공연을 즐기는 것, 그들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이 아닐까 생각한다.
몬트리올 구경을 마치고는 퀘벡으로 향했다. 캐나다가 워낙에 넓다 보니 퀘벡으로 가는 시간이 길어 이동에 오후 시간을 다 썼던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고 바로 숙소로 갔으니 말이다. 토론토에서 몬트리올, 몬트리올에서 퀘벡으로 이동한 만큼 그 거리도 상당했는데 총 793km였다. 하루에 차로 그 정도 거리를 이동해본 경험이 전무하기에 이날은 정말 피곤했다. 그래도 캐나다의 문화, 음식, 추위, 크기를 한번에 경험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