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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언니 Jan 28. 2021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 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나쓰메 소세키 '풀 베개'



영업팀장이 불러서 그의 자리로 갔습니다. 이렇게 불려 갈 때는 유관부서와의 '협의'라쓰고 '전투'라 읽습니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처음 한마디 부터 세게 뱉습니다. 내가 한 보고가 맞는데 왜? 뭐! 이런 너낌적 너낌으로 툭툭 내뱉습니다. '잘 싸웠다' 생각하고 제 자리로 돌아와 다시 확인을 하며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팀에서 막내 직원이 만든 데이터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ㅅㅂ...' 육성으로 욕이 나왔습니다. 기껏 우기면서 내가 맞다고 싸우고 왔는데, 내가 믿고 만들었던 데이터의 숫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데이터 만든 직원이 꼴에 재택근무라고 집에서 일하고 있길래 전화해서 정색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보고 다 했는데, 네가 만든 데이터 살펴보니, 네가 데이터 잘못 뽑았다. 설정에 오류가 있지 않냐! 잘못된 데이터로 내가 허위보고한 결과가 되었지 뭐냐. 네가 만든 데이터를 믿고, 보고자료 만들고, 상사에게 보고 다 했지 않냐... 어쩔?! 지금 당장 데이터 제대로 만들어서 보내라"

그동안 상사들이 내가 숫자 잘못 만졌을 때, 버럭! 지랄! 협박! 자존감 뭉개기 한 것이 너무 상처가 됐기 때문에, 제 밑의 직원에게 이런 지적질 하는 게 참 조심스러웠었습니다 다. 그래서 그동안의 실수에는 웬만하면 틀린 거 수정하라고 한마디 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정규직원이 아니기에 맘 잡고 사람 만들기도 참 애매했습니다. 하지만, 계약직 직원도 함께 일하는 동안은 부하직원이고, 지금 그녀의 실수가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실수가 반복될 때, 특히나 유관부서에게 우리 팀 자료가 신뢰를 잃게 되었을 때, 내 보고가 내가 아닌 사람의 실수로 인해 내 평판이 나빠진다고 생각되어 순간 화가 치솟았습니다. 평소 그녀의 모습으로 반추했을 때, 반복된 실수에 대해 어떤 상황인지 인지를 못하는 것 같아서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진 않았지만, 정말 단호하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전화로 말하고 나서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부하직원의 데이터 오류로 모든 자료를 다시 만들고 층에서 제일 늦게 퇴근하면서도 계속 떠나지 않았던 마음의 잔여감이 있었습니다. 나의 차가웠던 말이 그녀에게 어떻게 박혔을까였습니다. '나도 수없이 많이 자료 만들다 틀렸는데... 나도 지금도 틀리는데...' 그녀가 저처럼 소심해서 혹여나 내일 출근하지 않을까 봐,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고 싶어 할까 봐, 혹시나 울지 않았을까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엑셀을 많이 해서 손목이 아프고,
머릿속에 숫자가 맴돌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때 저 위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토닥이고 잠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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