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2살 어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여동생과 같이 다니면 주변 아주머니들은 항상 제 동생에게 "이쁘다~ 어쩜 이렇게 이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아는 언니, 공부를 참 잘하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를 서운함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란 저는 어쩔 수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 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특목고에 입학했습니다. 명문고인 만큼 재학생 대부분이 소위 스카이(SKY, 서울대 연대 고대의 앞자를 땀)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스카이에 입성하지 못하고, 그저 서울 소재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만 칭찬으로 듣던 제가 서울 소재 대학에 간 것은 축하받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설레는 새내기 대학생의 시작을 축하와 기쁨보다는 입시에 실패했다는 좌절감으로 시작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감정보다는 남들이 하는 그 말 때문에 저 스스로를 루저로 믿어버렸던 어리석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남들과 똑같은 대학생이 되면 안 된다는 무의식 속의 열등감 때문에 그를 극복할 생각으로 교내 영자신문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특별한 활동을 해서라도 저의 대학생활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야 했던 거 같습니다.
대학 내에서도 상위권 학과가 아니라는 열등감 때문에 저는 특별함을 증명을 내고 싶어서 영차 신문사가 즐겁지 않은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편집장까지 꾸역꾸역 해냈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하루도 편하게 보낸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학생 기자 일과 학습을 병행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스펙을 쌓았고 졸업 즈음에 입시 스터디를 할 때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스펙과 영어 실력 그리고 제2외국어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인터뷰 실패의 쓰라림도 있었지만, 기어이 대기업의 핵심부서에 입사를 했습니다.
합격통지를 듣고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딱 나를 듯이 기뻤고, 그 이후로 적응하는 데는 참 쉽지 않았습니다. 눈물, 콧물, 그야말로 피땀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누락 없이 대리가 되고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작년 한 해 승진을 앞두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요즘의 호칭은 선임에서 책임, 이전 호칭은 과장에서 차장 승진입니다.)
일하다 어떤 날은 승진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지면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그것마저 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발표한 책임 진급 명단에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늘 능력으로 인정받아야만 제 존재 가치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승진에서 누락하고 많이 허탈했습니다.
그런 제가 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승진 누락이 자존심 상해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실패 이야기를 상사에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팀에 언니, 이전에 같은 팀에서 일했던 제가 믿고 따르는 선배, 연락 주는 동기,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하고 또 했습니다. 전에는 '해결도 안 되는 일을 말해서 속상하기만 하지 뭐 득이 있냐'며 속으로만 삭히곤 했을 텐데 이 실패를 자꾸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자꾸 눈물이 나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단순히 위로를 받은 것뿐만이 아닙니다.
누락하고 나서 허탈하고 속상한 감정을 팀장님께 표현하고, 다음 승진에 누락되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13년 동안 한 회사에서 휴직 1번 하지 않고 열심히 커리어를 쌓았음을 강조했습니다.
선배도, 언니도, 팀장도, 친구도 그동안 참 고생 많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임 팀장님은 "아이고... 속상하지~"라고 마치 언니 같은 추임새를 하며, "아는언니가 조직에 기여한 것을 다 알고 있어. 그때는 내가 팀장이 아니었지만, 올해는 꼭 신경 쓸게."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켜지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 말이 무어라고 마음이 조금 위로받는 듯했습니다.
요 며칠은 자기 계발한다고 늘 아등바등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기던 제가 그저 푹 쉬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맛있게 먹고 푹 쉬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나면 울었습니다.
수고했다는 말, 그 한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제 안에 열등감과 인정 욕구가 저를 꾸준히 다그치기도 하고,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게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가 저를 제삼자로서 지켜봤다면 많이 안쓰럽기도 했었을 겁니다. 당분간 13년간 한 회사에서 이쁘고 젊은 시절을 바쳐 고생한 저에게 여유와 시간을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아는언니,
그동안 애 많이 썼다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