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여덟 번째 업무일지
영업에서 기획업무로 변경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공들여 작업한 결과였습니다. 기업 내부적으로 팀을 이동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전사 게시판의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시 모집을 통한 이동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옮길 당시에는 공개 모집 절차가 없어서 저는 후자의 방법으로 접근했습니다.
영업을 할 때는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위에서 아래로 지시한 사항을 이행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효율적인 업무 문화이긴 하지만, 피라미드의 젤 아래층에 위치한 사원은 개인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영업/마케팅 사원일 당시에 상품기획과 업무회의를 진행하면서 본 제 입장에서 상품기획이라는 업무는 좀 더 자신의 역량을 개별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영업조직보다 여성 멤버가 눈에 띄게 있었고, 그분들이 충분히 당당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잘 몰랐기 때문에 막연히...) 그 조직에서 전문성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획 조직 내의 팀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제가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팀이 보였습니다. 당시 신설팀이며 신기능을 중점적으로 기획한다는 점에 흥미로운 일일 것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물론 그 팀에 아는 사람도 없고 팀장님도 잘 몰랐습니다. 다만 해당 팀에 새로운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우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팀장님께 메일을 써서 간단한 이력 소개와 함께 팀에서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의견을 전했습니다. 후에 경험해보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메일을 보냈을 때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되려고 그런지 팀장님께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간단한 답메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동하고자 원하는 팀의 리더와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입 면접 때는 몇 시간씩이나 시험을 봤지만, 이미 회사 내에서의 경험이 있는 경우에는 이렇게 면접도 간단하게 보는구나 싶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정도 업무 능력은 검증이 되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제가 신경 쓴 부분은 인간적으로 호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되고 싶도록 어필하는 것이었습니다. 면접을 보고도 여러 절차상 당장 쉽게 팀을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몇 달에 걸쳐서 팀장님이 해당 조직장과 HR과 조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 기간을 기다리면서 저는 제 자리에서 역할을 충실히 하며 때를 기다렸고, 옮기고 싶은 팀에도 종종 찾아뵈어 인사를 하고 농담도 하며 팀장님께 늘 웃는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최종 조직 이동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영업 마케팅의 이력을 가지고 기획에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매우 뿌듯했습니다.
팀을 옮겨 제일 처음 맡은 일은 경쟁사와의 신제품 기능 분석이었습니다. 영업팀에서는 매출과 가격운영에 가장 신경을 썼다면 (상품) 기획에서는 신제품 콘셉트 개발 및 경장사와의 비교 분석을 통한 자사의 우위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처음 맡겨진 업무는 경쟁사 최신 신제품과 우리 제품의 경쟁력을 비교하여 자사의 우위를 보여주는 기능을 어필하고 동등 혹은 열위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신고식 하는 것 치고 꽤 큰 일이었습니다.
우선 경쟁사 매장에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 신제품이 언제 들어오는지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장 직원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유리하여, 아주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기 일수가 됩니다. 대표 매장이나 백화점 등에 지나가며 수시로 방문해서 제품 소식을 묻고 출시 일정을 체크하게 되다 보니, 회사 이외에 사적으로도 친구와 만날 때에도 경쟁사 매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약속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제 습관 중 하나가 됩니다. 그냥 일터이지만 저에게는 쉼터이자 놀이터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늘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위한 숫자 작업을 하느라 머리가 아팠다면, 이번에는 같은 보고서를 만들어도 실제로 뛰어다니면서 확인하는 작업들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연구소 개발자 분들과 만날 기회도 더 많이 생겼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인문계를 나와서 공대생들을 만난 건 회사 입사 후 처음이었는데, 그게 또 참 신기했습니다. 다만 환상을 갖은것과 달리, 개발자 분들과 문과생 사이의 언어소통의 장벽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개발자분들은 그들만의 세게 와 그들만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개발이 되냐 안돼냐의 이분법적인 접근으로 이야기하시는 것 같고, 제가 어느 정도까지 체계를 잡아드려야 딱 그 이후에 되는 것만 실행하겠다는 입장을 볼 때면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음도 절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새로운 일은 신이 나는 것이어서 몇십 장이나 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면서도 의미 있고 뿌듯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렇게 신제품을 뜯고 사용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던 경험을 살려서 제 개인 블로그에 개인적으로 산 얼리어답터 제품 후기 같은 포스팅을 할 때면 직업의식을 발휘하여 열과 성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첫 업무를 통해 부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어서 적응도 빠르게 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보고서를 영업/상품기획 및 관련 전 부서에 공지하고 함께 나누었을 뿐 아니라, 대강당에 수십 명의 인원을 모아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설문조사까지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대강당 프레젠테이션 신고식으로 영업부서분들이 제가 상품기획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신 분들도 있었고, 새로운 부서에서의 적응과 활약을 응원해주기도 했습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업무를 도전함에 있어서 역시나 늘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부서를 옮기는 일, 새로운 부서의 팀원들과 어울리는 일, 새로운 일을 맡아 해내는 모든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