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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노트 Jan 05. 2018

스위스의 겨울밤..퐁듀에서 한국을 느끼다

우리 가족을 위한 단출한 라클렛 식탁. 차갑게 해 둔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린다.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로 시작하는 황진이의 시조가 절로 생각나는 겨울날의 깊은 밤이다. 위도는 서울보다 10도가량 높고 서머타임도 끝난 바젤의 저녁은 오후 네 시가 넘어가면서 일찌감치 시작된다. 독일 함부르크 같은 북해 연안의 도시들은 오후 세 시면 어둠이 내려앉으며 바람이 매서워진다. 유럽 겨울의 긴긴 저녁나절을 보내며 찬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대표적인 지방 보충용 치즈 음식이 있다.


라클렛(Raclette)은 라클렛 치즈를 녹여 삶은 감자에 얹어 먹는 매우 간단한 요리다. 감자를 삶아놓고 라클렛 그릴을 꺼내 예열한 후 네모난 라클렛 치즈와 곁들일 오이피클만 준비하면 끝! 가정용 라클렛 그릴은 위에는 해물이나 채소 등을 올려 구워 먹을 수 있는 그릴판이 있고 그 밑에 개인용 치즈 그릴이 들어가는 열판이 있는 이층 구조로 돼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녹인 치즈 위에 빨간 파프리카 가루를 톡톡 뿌려 먹는 게 매콤하게 먹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매운 것 좋아하는 한국 사람 입맛에 파프리카 가루 따위가 성에 찰 리 없다. 내 경우에는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주면 오이피클과 곁들여 느끼한 속을 달래는 데 안성맞춤인 것 같다.

개인 라클렛 그릴에서 적당히 녹은 치즈를 드디어 감자 조각 위에 얹는 순간. 치즈 위에 후추와 매콤한 파프리카 가루를 뿌려 먹는 게 정석이지만 매운 것 좋아하는 한국 사람 성에는 

한편 손님 초대의 경우 그릴에 올려 구워 먹는 재료만 신경 써서 준비하면 식탁이 가득 차는 한상차림이 된다. 여기에 단백질을 곁들인다면 육류로는 베이컨을, 해물로는 새우를 주로 굽고 채소는 취향에 맞게 올리면 된다. 우리 집은 주로 채소를 올리는데 양송이버섯의 밑동을 잘라 올린 뒤 안에 물이 채워질 때까지, 그 옆에는 애호박이나 양파를 올려 굽는다.


삶은 감자 대신 구운 양파나 채소 조각에 치즈를 얹어 먹는 맛도 참 좋다. 하지만 간혹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을 수도 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이면 마트 구석자리에 있던 라클렛 치즈들이 어느새 냉장고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띈다.


앞서 말한 라클렛은 찬장에서 무거운 라클렛 그릴을 꺼내기 귀찮으면 프라이팬에 치즈를 녹여 감자에 얹어도 손색이 없다. 계절의 구애를 조금 덜 받는 치즈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진정한 겨울 음식으로 꼽는 것은 퐁듀(Fondue)다. 퐁듀에는 까끌롱(Caquelon)이라고 하는 도자기 그릇과 우묵한 그릇 안에서 끓고 있는 치즈를 찍어 먹기 위한 긴 포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먹는 내내 그릇을 데우며 치즈를 보글보글 끓게 만들어 줄 휴대용 스토브도 있어야 한다. 퐁듀는 일단 이런 장비만으로도 겨울철 요리라고 할 수 있다.

아빠와 아이의 포크가 들락날락 제일 바쁘다. 우리 집 까끌롱과 그릇세트는 스위스 국민동화인 셸렌 우어즐리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려진 것인데 이사하면서 까끌롱의 이가 나가버렸다. 

치즈가 끓고 있는 까끌롱 안에 빵을 찍어 먹는 전형적인 모습 전에는 약간의 밑 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위에 까끌롱을 놓고 데우며 향을 위해 생마늘을 문지른다. 용기가 데워지면 화이트 와인과 치즈를 휘휘 저어 풀어 녹인 후 한소끔 끓인다. 식당에서 먹는 퐁듀에는 와인향이 한가득 배어 있는데 알코올 성분이 싫으면 애플사이다나 사과주스로 대체해도 된다.


마지막으로 전분가루를 넣어 농도를 맞추고 보글보글 끓는 상태에서 불이 붙여진 휴대용 스토브가 있는 식탁으로 옮기면 완성이다. 식당에서 서빙 받을 때도 딱 이 상태인데 이때보다 치즈가 끓어 조금 되직해지면 치즈의 고소함과 짠맛이 어우러져 최상의 맛이 된다.


치즈에 찍어 먹을 재료로는 라클렛처럼 삶은 감자와 빵이 있는데 빵은 작은 육면체로 잘라야 치즈에 찍어먹기 쉬우므로 퐁듀용 빵을 자를 때는 도마에 유독 빵가루가 수북하다. 현지인들은 감자보다는 빵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바삭한 빵에 녹인 치즈를 얹는 식감이 더 좋기도 하고 감자 역시 조각으로 잘라야 하니 포크로 찍으면 바로 부서져서 치즈의 망망대해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지구 반대편 산악지방의 음식인 퐁듀에는 의외로 한국과 비슷한 문화가 있다. 포크에 빵을 단단히 찍고 치즈를 공략하러 가는데 그만 나의 빵 전사가 까끌롱 안에서 장렬히 전사해 버린다면? 이럴 때 잃어버린 빵을 찾아 까끌롱을 휘휘 저어야 하는데… 그냥 할 수는 없고 벌칙이 있다! 바로 노래 부르기다. 얼른 포크를 내려놓고 식탁에서 한 곡조 뽑으면 다시 먹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스위스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정서가 있구나 싶은 생각에 약간의 안도감마저 드는 기분이었다.

까끌롱 냄비가 바닥을 보이는 순간. 치즈 밑부분이 눌러붙고 굳어져 마치 짭짤하고 바삭한 치즈과자 같다.

또 한 가지, 여럿이 둘러앉아 한 냄비에서 먹는 것은 우리의 찌개 냄비에 여러 숟가락이 들어가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위생상의 이유로 지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문화인데 어찌 됐건 이런 한 냄비 문화가 어려운 시절에는 보편적이었겠다 싶은 생각에 친근감이 들었다. 물론 평소에는 절대로 이렇게 먹는 예가 없다.


앞서 말한 라클렛이 여름이 지나갔음을 알린다면 퐁듀는 찬바람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쌀쌀한 날에 옷깃을 여미게 되면 텔레비전 광고에 퐁듀를 먹는 가족이 나오고 오두막에 차려진 퐁듀 식탁이 인쇄된 쇼핑백이 보인다. 여느 때처럼 장을 보러 들린 마트에는 퐁듀 치즈가 진열대를 채우고 그 앞에 퐁듀 전용 까끌롱과 포크, 푹신한 천으로 만들어 감자를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바구니 등이 보인다.


한 가지 팁이라면 퐁듀 식탁에는 얇은 옷을 입고 앉는 것이 좋다. 옷에 치즈 고린내가 배는 만큼 통풍하기 편해야 하고 먹다 보면 퐁듀 스토브의 열과 함께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더워지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퐁듀를 먹으며 창문을 열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식후 환기를 시켜도 며칠간은 치즈 냄새가 남는다. 무엇을 먹었는지 짐작 가능한 냄새가 남는다는 점은 된장이나 청국장 같은 한국 음식과 비슷하다. 퐁듀를 먹을 때면 상 앞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더욱 마음이 푸근해지는 겨울 저녁이 된다.

바젤=김선진 객원기자  reunite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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