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남편의 변화
난임병원에 가기 전날 밤이면 남편에게 으레 묻는 말이 있다. "여보, 내일 병원에 같이 갈 거야?"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 남편은 대답만 하면 된다. 이른바 '답정너'다. 하지만 난임 시술 초창기 남편은 "나 병원 갔다가 회사 출근하면 늦는데? ^^;;"라며 매번 정답을 피해 갔다. 그럴 때마다 펭수의 유행어를 날려주고 싶었다. 눈치 챙겨..
출근 시간이 이른 탓에 남편이 모닝진료도 같이 갈 수 없다는 건 사실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난임병원에서 시술을 준비하다 보면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데 어떻게 진료 당사자도 아닌 직장인 남편이 날마다 시간을 비울 수 있겠는가.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남편은 병원에 가도 마땅히 할 게 없다. 초음파 진료만 보는 경우엔 남편은 진료실조차 같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임신에 성공해 아기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진료실에 함께 들어가는 남편들이 있긴 하다. 우리 남편은 언제 진료실의 문턱을 넘어보려나..ㅠㅠ)
상황이 그렇다 보니 차수가 높아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병원을 혼자 다니게 됐다. 병원에 혼자 다니지, 혼자 약 먹고 주사 맞지.. 다른 남편들은 임신에 실패하면 같이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린다는데 우리 남편은 그렇게 슬픔을 격하게(?) 표현한 적도 없다. '난임치료는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라는 명제가 나에겐 썩 와닿지 않았던 이유다.
얼마 전 4차 이식을 앞둔 전날 밤도 그랬다. 남편이 이식 당일 병원에 같이 못 갈 수도 있다기에 그러려니 했다. 다음 날 회사에 휴가를 낸 나는 점심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병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반차 쓴다고 말 안 했잖아~"
집에서 택시를 타면 병원까지 10분이 채 되지 않는데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려고 일찍 온 거였다. "나 이식하고 회복실에 누워있다가 주사 맞으면 한 시간은 걸릴 거야. 집에 가서 쉬다 와." 남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리면서 "화이팅" 하고 나를 응원했다.
시술이 끝나고 한 시간 만에 다시 만난 남편에게 의사 선생님의 말을 전하면서 차에 올라타자 뒷좌석에 가득한 박스 더미가 눈에 띄었다. 내가 시술하는 사이에 남편이 장을 봐온 거였다. 박스 속엔 몸보신을 시켜주겠다고 사 온 전복, 닭, 갈비 등 온갖 식재료가 가득했다. 이식 후에 적게 돌아다니려고 내가 이미 가득 채워 놓은 냉장고가 떠올라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남편도 마음속으로 열렬히 나를 응원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말을 삼켰다.
최근 들어 남편은 내가 챙겨 먹는 영양제며 처방된 약 시간을 깜빡하고 놓치면 먼저 알아채 나를 놀라게 한다.
병원 가는 날을 미리 말하지 않아도 잘 때려맞추는(?) 걸 봐선 시술 스케줄도 파악한 모양이다. 그동안 신랑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난임이라는 벽 앞에서 더 돈독한 동지가 돼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김지영 기자 jykim@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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