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여행과 난임
어느덧 시험관 횟수가 5차나 됐다. 아, 내가 이렇게 오래 난임병원에 다니게 될 줄이야..ㅠㅠ 남편과 연애를 시작해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는 10년 동안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다. '확률상 세 번 안에는 되겠지', '설마 네 번째에도 안 되겠어' 하고 생각했는데 믿었던 확률은 내 편이 아니었다. 병원에 오래 다니면서 나는 난임에 대해 박사가 됐다. 이런 나도 한때는 난임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해 봄이었다. 휴가철도 아니건만 회사에서 갑자기 휴가가 주어졌다. 남편이 모처럼 생긴 휴가인데 회사일 때문에 같이 여행을 갈 수 없으니 장모님이랑 2박3일이라도 제주도에 다녀오면 어떠냐고 권했다. 마다할 이유가 1도 없었다.ㅎㅎ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간 적이 있던가. 나는 부랴부랴 엄마의 일정을 체크해서 속전속결로 비행기표와 렌트카를 예약했다. 시일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에 몇 번씩 다녀왔지만 유채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아뿔싸! 그런데 하나 놓친 게 있었다. 바로 시험관 일정이었다. 당시 나는 과배란 주사를 맞고 있었다. 과배란 주사는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엄마랑 방을 같이 쓰면서 엄마 모르게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 (부모님께 시험관 시술 중임을 밝히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원에 가는 일정이랑 겹친다는 거였다. 과배란 도중 병원에 몇 번씩 방문해 난자가 골고루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그날 중 딱 하루가 겹치는 거였다.
제주도 유채꽃이 나를 부르고 있어!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늦게 가면 안 될까? 그래서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봤다.
"제가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병원에 가는 날을 바꾸면 안 될까요?"
"아니요. 정한 날짜에 오셔야 해요"
완전 단. 호. 박. 담당 간호사와 통화했는데 상당히 엄격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 여행 계획은 와르르 무너졌다. 엄마랑 성산일출봉의 유채꽃도 보고 다금바리도 먹고 민속오일시장도 가보고 싶었는데.. 풍경 좋은 제주 카페를 3곳이나 찾아놨는데..
과배란 주사를 맞기 시작한 이상 중간에 멈출 수도 없는 거였다. 여행이 무산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예약한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속상한 마음에 '왜 이렇게 병원이 융통성이 없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철없고 난임 무식자(?) 같은 생각이었다. 난자를 키우고 채취하는 건 하루이틀 참으면 되는 감기에 비할 바가 아닌데 말이다.
제법 고차수가 된 나는 이제 과배란이나 이식 일정이 있을 땐 여행 계획을 일절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시댁 모임에서 여행의 유혹이 시작됐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휴양지로 가족 여행을 가보면 어떻겠냐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거였다. 하와이, 괌, 보라카이 등..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전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들뜬 마음도 잠시, 그때까지 난임 시술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때도 시험관 일정과 겹친다면..? 이제 이런 고민은 그만두고 태교여행지를 고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김지영 기자 jykim@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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