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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노트 Mar 17. 2020

[좌충우돌 난임일기]이번에는 덜 슬픈 줄 알았다

대학이나 회사의 합격 발표도 이보다 긴장되진 않았던 것 같다. 엄청난 긴장감은 이내 공허함으로 가득찼다. 바라는 일이 이토록 이뤄지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연락은 벌써 다섯 번째였다. "다음 생리 주기에 맞춰 병원에 오시고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겉돌더니 잠시 멍했다.


이번 차수는 약을 가장 많이 쓴 차수였다. 면역을 낮춰주는 각종 항생제, 면역 주사부터 호르몬 주사까지. 의사 선생님도 내 요구에 따라 가능한 모든 처방을 적극적으로 해주셨다. 이전에 냉동 배아를 이식했을 때와 달리 이식 후에도 매일 배에 주사를 두 대씩 맞았다. 오랜만에 혼자 배에 주사를 놓아서인지 멍이 생겼고, 멍을 피해서 주사를 놓을 데가 없어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주사하다 보니 멍은 더 커졌다. 하루는 배에 축축한 느낌이 들어서 봤더니 지혈이 되지 않아 옷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어 놀라기도 했다. 돈을 많이 쓰고 약을 더 많이 먹는 게 노력이라면 이번 차수는 가장 많이 노력한 차수였다. 


슬픔도 반복되면 무뎌지는 걸까. 처음으로 병원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긴 터널에 갇힌 듯 우울했던 시간도 이번에는 없었다.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고 실없는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덜 슬픈 줄 알았다.

며칠을 무던하게 지낸 뒤 남편의 권유로 주말을 이용해 함께 짧은 여행을 떠났다. 마침 우리가 간 곳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절을 산책하다가 문득 '백팔배를 해야 아이가 생기려나' 하는 생각에 방석을 집었다.


절을 시작할 땐 아이가 생기게 해달라고 빌었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백팔배는 30회를 넘기자 몸에 반응이 왔다. 내 앞에서 절하는 분과 눈에 띄게 속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아 벌써 다리가 저리다니! 몸이 힘들어지자 뭔가 빌고 있었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렸다. 그리고 백팔배를 마칠 때쯤엔 소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를 위로하는 마음만 남았다. 그래 안될 수도 있어, 실패할 수도 있어, 다시 하면 돼.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내 이름을 적은 초를 켜는데 '힘내라 아가야'라는 한 줄을 더 끄적였다. 부디 오는 길에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와주기를, 꼭 와주기를 바랐다.


김지영 기자 jykim@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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