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면 걸리는 감기. 주변에선 “아이들은 다 아프면서 큰다”고 위로했지만 그 말은 내 마음을 단 1도 달래지 못했다. 밤새도록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 옆에서 물수건을 갈아주며, 코가 막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를 토닥이며 수백 번도 더 되뇌었던 말은 ‘하느님 차라리 제가 아플게요’였다.
늦은 봄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태평이는 다음해 여름이 올 때까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때 태평이의 목엔 늘 손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언제든 콧물을 닦아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집에선 대개 2~3세 아이들 목에 손수건을 둘러 놓는다.)
태평이를 데리고 어린이집 문을 닫고 나오면 가장 먼저 아이 목에서 손수건을 풀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아이의 목수건이 마치 나의 주홍글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가 일하느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서 이렇게 늘 아파요’라는.. 물론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자책감에 따른 행동이었을 거다.(물론 보이기에 강아지 목줄처럼 답답해 보였던 것도 이유였다.)
자책감이 쌓이고 쌓이던 어느 날. 그날도 마감시간을 앞두고 분초를 다투며 노트북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 칼퇴할 수 있고 그래야 태평이가 어린이 집에서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을 시간이 1분이라도 줄어든다는 생각에 그렇게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쳤다.)
그러던 중 핸드폰이 울리는데 ‘어린이집’이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아이가 열이 많이 오르니 병원에 데려가라는 선생님의 전화였다. 초고는 다 써놓은 상태였지만 다듬지 않은 거친 글이었다. 이대로 마감을 한다면 데스크(부장)에게 한바탕 깨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어린이집으로 향해 있었다. 과감히 데스크에게 마감을 알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택시를 잡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정신이 있냐’며 소리치는 데스크의 목소리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자실로 올라갔다. 그렇게 꾸역꾸역 일을 마무리 한 후 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몸이 불덩이인 아이를 안고 병원에서 대기를 기다리며 긴장되는 마음에 얼마나 입술을 뜯었는지 나중엔 피가 날 정도였다. (눈물을 흘리면 아이가 더 놀랄까 울음을 참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입술 뜯는 일 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아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내일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료를 받고, 약을 타고 나오자 퇴근 후 헐레벌떡 달려온 남편과 마주쳤다. 아이를 품에 안기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서야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렇게 1년여 동안 태평이는 온갖 감기에 홍역까지 앓고 난 후 목수건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상상 속으로 수 십 번도 더 사표를 내야 했다.
그 뒤로도 가끔 아프긴 했지만 다행히 열이 심했던 적은 많지 않다. 이제는 웬만해선 감기도 잘 옮지 않는다. 혹독했던 그 시절 덕분에 누군가의 “어릴 때 자주 아파야 커서 안아프다”는 말이 현실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그 해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아이가 너무 예쁜데도 둘째를 쉽게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마 태평이가 목수건을 달고 다니던 그때의 시리디 시렸던 상처가 아물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임성영 기자 rossa83041@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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