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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노트 Dec 08. 2017

[독자노트]주말, 아내의 시댁에서 김장을 했다

*이번 사연은 서울 마포구에서 5살 난 딸을 키우는 아이디(ID) 사자머리 님이 보내준 사연입니다.


몇 주 전 가족모임이 있어 본가에 들렀다.


다음 주에 김장할까 하는데, 시간 있으면 올래?


저녁을 먹는 중 어머니가 하신 말씀에 순간 시간이 멈추며 온몸의 신경이 아내의 눈동자로 향했다. 미세한 떨림! 남편의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김장을 같이 한 적은 없었다. 결혼과 함께 아기가 생기기도 했고 아들 내외가 맞벌이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아는 어머니는 철마다 김치를 손수 담가 우리 집으로 배달까지 해주셨다.


여기서 잘 해야 한다. "어... 우리 다음 주에 일정이 있는데.. 그냥 엄마 혼자 하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는 "왜 혼자 알아서 대답해? 지금 나 나쁜 며느리 만드는 거야?"라고 할 거고 "알았어요. 다음 주에 일찍 올게. 같이 해요" 라고 하면 "오빠가 할 거야? 그럼 우리 집 가서도 김장할 거야?"라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이럴 때는 그냥 팩트를 체크해 보는 게 좋다. 몇 포기를 할 건지, 몇 시부터 할 건지, 지금까지는 김장을 누구랑 했으며 갑자기 왜 같이 하려는지 등.. 사실을 파악하고 와이프가 최대한 이번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머니의 얘기를 들은 아내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시댁에서 처음으로 김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남편인 내가 항상 옆에 있겠다! 라는 말을 열 번은 했다.^^


결전의 주말 아침, 5살 된 아이의 기상시간과 약간의 뭉그적(고의는 아니고 본능적인 것 같다)으로 본가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다. 전날 부모님과 함께 사는 형이 배추를 씻어 절여 놓았고 아버지는 무채를 썰어 놓고 출근했다. 문득 총각시절에 김장 한번 돕지 않고 이래저래 바쁜 척(대부분의 시간은 아내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결혼하면 효자가 된다더니 나도 그런가 싶었다.

딸내미와 함께 김장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 내 손은 김칫소를 넣고 있었지만 내 눈과 귀는 항상 아내에게 향해 있었다. (사진=독자 사자머리 님 제공)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으로 김장을 시작했다. 대부분 힘이 들어가는 일은 미리 해놓았으니 특별하게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딸내미는 어린이집에서 놀이삼아 해 본 김장을 엄마 아빠와 같이 한다고 하니 아주 신나했고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주고 싶어 하는 아내는 '딸내미와 함께하는 김장'이라는 생각으로 '시댁'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물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김장이라는 노동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계속해서 화제를 던지며 최대한 이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 중반까지 아주 스무드~하게 잘 지나갔다. 그러다 내가 김치 속을 버무리는 데 집중한 나머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찰나 결국 어머니가 한마디 날리셨다.


김장했다고 집에 가서 남편들 잡지 마라


OTL. 우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났다. 아마도 내가 아내 눈치를 보느라 너무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모든 갈등은 말에서 시작하고 단어의 쓰임과 억양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런 악의가 없고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인 줄 알지만 여기는 시댁이 아닌가. 똑같은 말이라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은 며느리에게 조금 다르게 와닿는다.

올해 나는 38년 만에 처음으로 김장을 담갔다. 김장이 끝나는 순간까지 수만가지 생각이 나의 전두엽을 지나쳤고, 온몸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사진=독자 사자머리 님 제공)

다행히도 아내는 "안 그래요. 오빠가 거의 다 했는데요" 하며 지나간다. (속으로 너무나도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아내가 "오빠, 어머니께 집에서 내가 괴롭힌다고 그랬어?"라고 할까 봐 얼마나 떨었는지..^^;;;) 힘든 김장의 피로를 풀어주는 건 뜨끈한 수육에 갓 담근 김치를 올려 먹는 것 아니던가. 나는 평소보다 아내의 숟가락 위에 더 많은 고기를 살며시 올려 놓았다.


"고생했어. 수고했어" 집으로 오는 길, 다섯 살 딸내미는 낮잠 없이 하루를 보내서인지 동요 한 곡이 끝나기 무섭게 꿈나라로 빠져든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오늘도 무사히 아내의 시댁에서 우리 집으로 복귀하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내에게 몇 번의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어두운 창밖 넘어 어머니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번 김치는 더욱 맛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추억이 있으니까..


독자 사자머리 님  olivenote@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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