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지나간 날

아이는 종종 폭발한다

by 묘묘

고등학교 OT 간다며 아침에 해맑은 표정으로 집을 나간 애가 나오면서 "망했어. 적성검사라 하더니 반배치에도 쓴대. 다른 애들은 OMR카드 다 빼곡히 채웠던데 나는 다 풀지도 못했는데 자꾸 지나가." 하더니 친구와 톡을 한 휴 대성통곡한다. "어떡해. 나 다 망했어. ㅇㅇ이(친구)는 쉬워서 다 했다는데, 나 똑똑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고 바보야. 나 왜 살아. 내 인생 망했어. 다 때려치우고 싶어..."


둘째는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잘하고 칭찬받는 거에 집착했다. 애들 초등에 성적이나 공부에 무심한 엄마에게 화낸 적도 있다.

"엄마. 다른 엄마들은 애가 100점 받으면 용돈도 주고 칭찬도 엄청 많이 한다는데 왜 엄마는 좋아하지 않아?"

"무슨 말이야. 100점 받으면 잘했다 하잖아."

"아니, 그냥 응 잘했네 하지 폭풍 칭찬 없잖아. 100점 받아도 잘했다, 90점 받아도 잘했다."

"그렇게 칭찬하면 더 부담스럽지 않니? 그리고 잘 한 걸 잘했다 하지 뭐라 해?"





울다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애는 울다 숙제를 못 했으니 오늘은 학원에 가지 않고 동영상으로 강의를 듣겠다 선언했다. 그래, 선생님께 말씀드려 링크받아하니 스터디 카페 가서 듣는다며 쌩 나간다. 수업 전에 저녁 일찍 먹어야지 하니 아니 점심 늦게 먹고 많이 먹어 배 안 고파 뭐 간단하게 먹을 거야 하고 가방 챙겨 나간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톡이 울린다.


'엄마 나 집에 가서 울어도 돼? 나 지금 수업 못 듣겠어. 위로받고 싶어.'

'응 어서 와.'


간만에 폭풍이 왔다.


집에 온 아이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둘러 쓰고 꺽꺽거리고 목이 쉬도록 운다. 나 수학 테스트도 망했어 바보야 나 같은 거 왜 태어난 거야. 나는 멍청이야. 나는 왜 천재로 안 태어난 거야. 나는 똑똑하고 싶은데. 저리 가. 오지 마. 토닥토닥하지 마. 엄마가 괜찮다 해도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아. 엄마는 괜찮아도 나는 안 괜찮단 말이야. 나는 이런 거도 못 하는 내가 싫단 말야. 다 그만두고 싶어 나는 바보야.

한참을 옆에 누워 아이를 안고 기다린다. 울다 울다 목이 쉰 아이의 울음은 천천히 멈춘다. 그때 묻는다.


"무슨 일 있었어? 동영상 링크로 수업 듣는다 하지 않았어? 그럼 테스트 안 보는 거 아니야?"

"그러려 했는데 선생님께서 라이브 들을 거면 테스트는 보라 하셨단 말이야. 그래서 봤는데 반도 못 풀었어. 지금까지 점수 잘 나온 건 다 외워서 푼 거야. 나는 이해한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고. 나는 바보야."

"스카에 출력할 곳 있어? 시험지는 어떻게 출력했어?"

"노트북 안 되길래 폰으로 받았는데 잘 안 보여서 스카에서 출력했어. 몇 분 안 걸렸어."

"그럼 출력하고 시간 재고 시험지에 푼 거야?"

"그냥 몇 분 더 한 것뿐이라 그냥 풀었어. 그래도 몇 분 차이 없었을 거라고."

"내신 준비하느라 빡빡하게 시간 재고 푸는 건데 핸드폰 보다 출력하러 가다 시간 쓰고 푸는 종이도 제대로 없어서 교재 구석에 볼펜으로 풀면서 어떻게 잘 풀어. 숙제 안 해서 빨리 풀기도 힘들었을 텐데."

"...... 내가 잘했으면 그냥 보고 빨리 풀었을 거 아냐."

"내신 시험은 풀 줄 아는 거 보는 게 아니고, 시간 내에 정확하게 풀게 해서 등급 가르는 게 목적이잖아. 원래 빡빡한데 숙제도 다 안 했는데 핸드폰으로 문제 풀면서 어떻게 풀어. 선생님께 지금 출력 안 되니 다음에 따로 시험 본다 하지 그랬어."

"보라 하시니 봐야 할 거 같아서. 전에도 집에서 수업 들으면 엄마가 출력해 줘서 시험 봤잖아."

"그건 내가 시간 맞춰 문제지 출력해 줬잖아. 스카에서는 그렇게 못 하는 거고. 다음부터는 학원 가지 않고 링크받는 날은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지금 집에 있는 게 아니라 테스트를 볼 수가 없어요. 테스트는 클리닉 가서 보겠습니다'하고 라이브 말고 녹화 링크로 받아."

"알았어. 하지만 진짜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문제 중 앞에 문제가 기억이 날 듯하면서 계속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어 이거 아는 건데 풀었던 건데 뭐지 생각을 하는데 시간이 금세 지나갔어. 나 반도 못 풀었다고."

"... 시간도 없는데 모르는 걸 왜 굳이 붙잡고 풀어? 너 저번에도 똑같은 말 해서 시험 볼 때 아는 것부터 풀고 최대한 주어진 시간 내에 점수를 잘 내는 것도 능력이라 했는데."

"하지만 그러면 싫다고. 나는 모든 문제를 잘 풀고 싶은데 막힌다고 넘어가면 기분이 엄청 나쁘고 나 자신에게 지는 기분이라고. 나는 순서대로, 잘 풀고 싶단 말이야."


" 너 그거 강박인 거 같은데?"





나는 약간의 강박이 있다. 젊을 때보다는 확실히 줄긴 했지만 지금도 남아 있다.

애들은 좀 편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예측 못한 곳에서 둘째는 묘하게 특정 루틴에 집착한다.


"내가 원해서 하는 거고 상황에 따라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면 그냥 취향인데, 너는 무조건적인 집착이 있잖아. 혹시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걸 못 지키면 엄청 기분이 나쁘고, 자괴감이 들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지 않니?"

"응 맞아."

"강박 맞는 거 같은데. 지금 너는 완벽한 내가 되려면 어려운 것들도 바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다 보니 어렵든 쉽든 순서에 맞춰 깔끔하게 해치우는 거에 집착하는 거 같아. 그런데 네 목표는 '잘하는 나 자신'이지 '뭐든 순서대로 하는 나'는 아니잖아. 그건 그 과정인 거고.

강박 인생 선배로서 말하는데, 강박이 없애고 싶다고 아예 없어지진 않아. 그런데 심하지 않은 거면 어느 정도 방향을 살짝 튼 조정 정도는 되거든. 너는 그거 될 거 같은데. 자기 암시를 하든, 목표를 세우든 방향을 바꿔봐. 순서에 대한 집착을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에 주의하는 거로 돌린다는 식으로. 강박에 휘둘리지 마. 네가 주도권을 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가."

"응... 그런데 나는 강박에게 이기기보다는 함께 춤을 추며 나아가고 싶은데 그건 안 돼?"

"커다란 개가 사람을 물려하는데, 나는 이 개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그냥 다가가면 안 되잖아. 네가 일단 그 개를 복종시켜 주인이 되고, 친해지면 그때 함께 춤을 추며 나가면 되지.

너는 충분히 네가 원하는 만큼 될 수 있어. 완성형이 아니라 나아가는 중인 것뿐이야. 지금부터 노력하면 언젠가는 완성형이 되겠지. The Great 루피. 완성형으로 가는 대항해를 하는 중인 거지. 자, 이제 밥 먹자."

(*가장 자주 쓰는 이모티콘이 잔망루피 시리즈)





아니, the Great가 뭐야. 엄마 진짜 이상해. 아이는 낄낄 웃다 툴툴거리다 하면서 저녁은 뭐 먹어? 저녁 먹고 선생님께 주말에 테스트 본다 연락드려야지 하며 식탁으로 향했다. 아니 그런데 엄마는 왜 나에게 강박 같은 걸 물려준 거야? 글쎄 말이야. 너는 왜 물려받은 거니?


대충 있는 거 데워서 밥을 주고 애는 아 또 밥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나 뭔가 바보 같다 하면서 밥을 먹는다. 오늘의 폭풍은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 폭풍은 언제쯤일까.




* 노트북이 안된 이유는 아이가 내 노트북 대신 남편의 업무용 노트북(패스워드로 잠겨 있는)을 홀랑 들고 갔기 때문. 과연 우리 집 부주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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