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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이름을 바꾸면 집값이 오른다고?

'LH' 를지우고 '센트럴'과 '리버'를 짓는 사람들

by 조통달

"아파트 이름 변경에 대한 의견 수렴"


오늘 아침, 카카오톡 알림 하나가 스마트폰 화면에 떴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구혁신LH이노힐즈' 아파트의 이름을 바꾸자는 전자투표 공지였습니다. 우리 아파트의 또 다른 이름은 '이노힐즈'입니다. 주민들은 보통 그렇게 부릅니다. 이름에서 'LH'를 뺀 것이죠. 무의식적인, 그러나 너무나도 명백한 자기방어의 발로입니다.


'LH'라는 두 글자는 어느덧 입주자들에게 지우고 싶은 주홍 글씨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LH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엘사'라고 부릅니다. '휴먼시아 거지'를 줄인 '휴거'라는 멸칭도 공공연하게 떠돕니다. 가난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계급을 나누는, 서늘하고 폭력적인 신조어들입니다. 이처럼 아파트 이름이 곧 사회적 꼬리표가 되는 현실 속에서, 명칭 변경은 생존과 자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을 휩쓰는 개명 열풍, 그들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쓰는가


아파트 개명은 이제 특정 지역의 유행을 넘어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그 중심에는 '공공'의 흔적 지우기가 있습니다. 서울 상계동의 '상계주공8단지'는 '포레나 노원'으로, 경기도 의왕시의 '오전동 주공아파트'는 '의왕 서해그랑블'로 탈바꿈했습니다. 심지어 민간 브랜드 아파트조차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이름을 바꿉니다. 서울 마포구의 '공덕삼성아파트'는 이름에 '래미안'을 추가하여 '공덕삼성래미안'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에는 동시대 한국인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성공 공식'이 존재합니다.


첫째, 자연을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포레(숲)', '파크(공원)', '리버(강)', '레이크(호수)', '오션(바다)', '뷰(전망)' 등 자연을 의미하는 단어는 이제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둘째, 중심을 갈망하는 욕망입니다. '센트럴(중심)', '시티(도시)', '메트로' 등은 아파트가 도시의 핵심 인프라를 누리는 중심지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셋째, 최고가 되려는 욕망입니다. '더 퍼스트', '프레스티지', '시그니처', '팰리스(궁전)', '캐슬(성)' 등의 단어는 노골적으로 고급스러움과 희소성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단어들의 조합은 결국 '자연 친화적인 중심지에서 누리는 최고급 주거 공간'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기호를 만들어냅니다.



'1억'의 마법, 기꺼이 감수하는 비용과 시간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건물 전체 재도색 비용과 각종 부대 비용은 고스란히 입주민의 몫입니다. 지자체 심사와 승인까지 걸리는 시간도 통상 1~2년에 달합니다.

이러한 금전적, 시간적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민들이 명칭 변경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름 변경이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이어진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구만 해도 '칠성 휴먼시아'는 2019년 '대구역 서희스타힐스'로 이름을 바꾼 뒤 시세가 1억 원 이상 올랐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개명 열풍에 불을 지폈습니다.


우리 아파트 근처 사정도 비슷합니다. '혁신도시LH5단지'는 얼마 전 '대구혁신에듀포레'로, '율하휴먼시아' 1, 2단지는 '율하센트럴파크'라는 뉴요커스러운 이름으로 새 옷을 입었습니다. '신천 휴먼시아'는 '신천역 센트럴 리버파크'로 강(River)까지 품었습니다.


이름 변경이 곧 집값 상승이라는 등식은 허상일 수 있습니다. 해당 시기의 부동산 시장 전반의 상승세, 주변 지역의 개발 호재 등 다른 변수들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름'이라는 가장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변화에 성공의 원인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그 과정의 이면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패기도 합니다. '더 나은 우리 집'을 만들자는 목표가 이웃 간의 공동체를 해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집의 가치, 사는(live) 곳인가 사는(buy) 것인가


결국 아파트 개명 열풍은 오늘날 우리가 '집'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거울입니다. 집이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거주 가치(use value)'는 뒤로 밀려나고, 오직 시장에서 얼마에 거래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교환 가치(exchange value)'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 우리는 어쩌면 집에 사는(live) 것이 아니라, 집을 사고파는(buy) 행위 그 자체에 더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는 사람은 그대로이고, 때때로 하자가 발견되는 옥상도, 악취가 새어 나오는 분리수거장도, 잡초가 무성한 정원도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이름이라는 껍데기 하나를 바꾸면 자산 가치가 1억 원이 뛰어오르는 이 기묘한 현상은, 아파트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상징 자본'으로 소비되는 '브랜드 공화국'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입니다.


저녁을 먹고 단지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우리 아파트 주변에는 곧 대구 제2수목원이 들어섭니다. 조금만 걸으면 제 영혼의 안식처인 안심습지와 금호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여름이면 거대한 연꽃단지에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집니다. 이 모든 자연의 언어를 그러모아, 시대의 욕망을 투영해 우리 아파트의 새 이름을 지어봅니다.


"대구혁신포레스트리버앤레이크파크블라섬힐즈(Daegu Innovation Forest River & Lake Park Blossom Hills)"


물론 이렇게 아파트 이름을 짓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장난스럽게 만든 길고 화려한 이름 앞에서 씁쓸한 웃음을 지어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LH'라는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솔직한 민낯이자, 이 시대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의 총합일 것입니다. 오늘 밤, 저는 전자투표 화면 앞에서 잠시나마 고민할 것 같습니다. 이 한 표가 과연 우리의 '삶의 공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자산의 값'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부끄럽지만 저도 아파트 이름 변경에 "찬성"을 누를 것 같습니다.



LH를 지우고 영어로 아파트 이름을 바꾸면 집값이 오른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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