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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통달 Jun 16. 2020

다시 병이 도졌다

백수일기_11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동네 곳곳에 주차되어 있는 캠핑카인지 카라반인지를 불법주차 신고 앱을 통해 신고를 하고 오마이뉴스(http://omn.kr/1jl55)에 기고도 했다. 운이 좋게도 브런치에 올린 같은 내용의 글(https://brunch.co.kr/@myoung21/27)이 다음 메인 페이지에 걸려 욕도 얻어먹고 응원도 받았다. 브런치에 올린 글에는 내가 신고한 카라반의 주인이 항의성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좀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그 카라반 주인은 나에게 해코지나 테러를 가하지 않았다.



다시 병이 도졌다. 지난주 점심 먹고 산책을 나갔다 어느 다리에 불법 도박사이트로 추정되는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가 래커(Lacquer)로 칠해져 있어 “생활불편신고”앱으로 신고했다. 어제는 퇴근하는 길에 보도블록이 푹 꺼져 있어서 “안전신문고”앱으로 신고를 완수했다(참고로 생활불편신고 앱과 안전신문고 앱은 올해 말에 통합될 예정이다. 나 같은 프로 불편러들은 참조하시길…). 래커 칠을 지우는데 얼마나 많은 절차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지 모르지만 도박사이트 불법광고 민원은 보름이나 지났는데 아직 ‘처리 중’이라는 메시지만 보여주고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관할 구청에 처리가 지연되는 이유를 따지고 들며 담당 공무원의 목구멍에서 “시발”이라는 들리지 않는 함성을 야기하는 항의 전화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절제와 최소한의 미학을 깨우치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 학도(學徒)로서 조용히 다리 위에 래커로 칠해진 불법 도박사이트의 사라짐을 기다릴 것이다.



요즘은 의도치 않게 미니멀 라이프를 살고 있다. 내 개인적인 퇴사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불필요한 사람들과 쓸데없는 일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하루에 수시로 들락날락하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SNS도 최대한으로 줄이니 이제는 보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진다. 하루 종일 있어도 카드 결제와 안전안내문자 이외에 오는 문자는 별로 없으며 수시로 울리던 단체카톡방의 알림 소리도 조용해졌다. 어제는 전화조차 오지 않아 혹시 전화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닌가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 보기도 했다. 인간관계란 것이 벌집 같아서 내가 먼저 쑤시지 않으면 가벼운 인간관계의 앵앵거림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 법이다.



돈을 벌어야겠다. 조선시대 망한 양반 가문의 후손답게 천성이 게으르고 가족을 건사하는 일에 젬병인 나로서는 돈을 버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절약하는 법은 알아도 돈을 버는 법은 아예 아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천상 건달의 삶을 이제 그만두려 한다. 유시민은 그랬다. 자기의 일상적 삶의 물질적인 조건을 만드는 일을 타인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너무 비참한 일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거라고. 비참함을 느끼기 전에 땀을 흘려야겠다. 그것이 책이든 글이든 일이든…



덥다. 어제는 대구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체감기온이 38도를 넘었다. 그래도 걷는다. 집에서 사무실로 걸어오는 길에 벌써 티셔츠가 땀에 젖어 축축하다. 햇빛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정도다. 걸어야 살 수 있다. 오다리이자 휜 다리임에도 난 걷는 것이 좋다. 가끔 무릎이 욱신욱신하지만 걷는 동안 걸음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가끔 나타나는 나무 그늘에서 땀 닦는 시간도 좋다. 역시 날씨가 더워져야 걷기의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다. 걷기 좋은 길이 있는 곳에서 일주일 정도 걷고 싶다. 밀린 팟캐스트 프로그램 백 개 정도 다운로드해서 스마트폰에 저장하고 이어폰으로 들으며 히죽히죽 혼자 웃고 싶다. 타박타박 걸어가는 시골길 어느 점방에서 가정용 냉장고에 보관 중인 시원한 칠성사이다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 아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돈을 벌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안전신문고 앱과 생활불편신고 앱으로 신고한 두 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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