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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통달 Apr 20. 2023

무등산 타잔의 꿈은 판사였다

4월 20일의 역사,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살인사건

1977년 4월 20일.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7명은 무등산을 올랐다.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아직 철거되지 않은 무허가 판자촌 8가구 집들을 철거하기 위해서였다. 8가구 주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반항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등산 무허가 판자촌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철거반원은 오자마자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철거반원들 옷을 잡고 울부짖었다.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렸다.

 

“어머니!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협조해야 합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의 지시에 자신의 무허가 판잣집에 있던 낡은 세간살이를 하나씩 집 밖으로 꺼냈다. 세간살이를 꺼낸 후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 흐지부지 철거만 하고 갔다가는 또다시 들어와서 살 수 있음을 철거반원도 알았다. 그래서 불을 질렀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눈이 뒤집혔다. 근처 무당집에서 일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집안에 있었다. 판자촌을 떠나 시내로 이사하기 위해 어렵게 모은 돈이었다. 불타는 돈을 가져오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어머니를 철거반원도 말리고, 박흥숙도 말렸다.

 

“어머니! 불에 들어가면 죽어요. 돈이 뭐 중요합니까? 그냥 살아요, 우리…”

 

그렇게 박흥숙의 집은 불타고 있었다. 철거반원은 다시 300여 미터 떨어진 김복천의 집으로 향했다. 당뇨와 폐결핵을 앓고 있던 노부부가 살고 있던 곳이다. 박흥숙은 철거반원에게 부탁을 한다.

 

“선생님들! 우리집은 어차피 불이 탔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고요. 이렇게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까?  저 집은 병든 노부부가 어렵게 살고 있으니 그냥 놔두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박흥숙의 부탁에 철거반원은 알겠다고 하고 말했다. 박흥숙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달래고, 부서진 세간살이를 정리했다. 잠시 뒤 철거하지 않겠다고 말한 김복천의 집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철거반원들이 김복천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박흥숙은 분노했다. 그렇게 사정을 했건만, 그 집은 아픈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조금만 말미를 달라고 했건만… 철거반원들은 그 집에도 불을 지른 것이다.

 

“선생님들!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부탁을 드렸지 않습니까? 아픈 노인네들이 산다고… 근데 그런 집에 불을 질러버리면 그분들은 어디 가서 산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철거반장 오종환은 대답했다.

 

“어린놈이 지랄하네.”

 

박흥숙은 눈에 불이 붙었다. 불타던 집에 있던 불들이 박흥숙의 가슴과 눈에 옮겨붙었다.


"탕!"


무등산 계곡에 총성이 울렸다. 박흥숙이 어딘가로 뛰어가 숨겨놓았던 사제총을 가져와 철거반원들을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

 

“무슨 짓이야?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거다. 쏘지 마라.”

 

철거반원들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총을 든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을 모으고 여동생에게 시켜 철거반원들을 꽁꽁 묶었다. 박흥숙은 그들을 묶어놓고 내로 내려가 광주시장에게 따질 셈이었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이 공부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외쳤다.

 

“사과해라. 불태운 우리집에도 사과하고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아픈 노인네 집에 불지른 것도 사과해라.”

 

그 순간이었다. 느슨하게 묶여져 있던 철거반원 하나가 줄을 풀고 박흥숙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박흥숙은 재빨리 피하고 옆에 구덩이를 파기 위해 두었던 망치를 들고 공격해서 2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병원으로 옮겼으나 2명은 죽고, 1명은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

 

놀란 박흥숙은 놀라서 그대로 달아났다. 몸이 작고 허약해서 무등산에서 무술을 수련했었던 자신의 몸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박흥숙의 여동생은 곧장 시내로 내려갔다. 광주시청으로 가서 시장을 만나려 했으나 시장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시청 직원에게 오빠가 철거반원을 죽인 사건의 전말을 전한 뒤 없어진 집터로 갔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공무집행방해죄, 여동생은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되어 무등산에서 하산했다.

 

박흥숙은 광주 시내로 내려와 은행에서 돈을 찾아 머리를 깎고, 잠바를 하나 샀다. 그 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갔다. 여수에서 다시 기차로 서울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경찰에 자수한다.

 

자수를 하여 검거된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법정에서 사람을 죽게 한 죄를 뉘우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박흥숙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흥숙은 사형 선고 후 딱 3년이 돼 가던 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흥숙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수석입학했다. 하지만 가난때문에 입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합격했다. 광주 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돈을 벌며 무등산에서 그는 사법시험공부를 했다. 그의 꿈은 판사였다.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런 대책 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몰아붙이고 쫓아내고 불태웠던 1970년대 그 시대 개발독재에게 과연 우린 어떤 죄를 물었는가?


사건현장에서 현장검증 중인 박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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