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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이 Mar 18. 2022

일본 어느 구장에서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팬들에게

6회 말_이어받고 함께 만들어간 최초이자 최고이고 싶은 스포츠 펍 오픈기

세 자매의 맏딸인 나는 일본에서도 K-장녀임을 숨길 수 없었다.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양보와 보살핌을 첫째의 미덕으로 알고 자란 나는 누가 나를 챙겨주기보다는 내가 챙겨주는 게 마음이 편하고,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양보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친한 정도와 상관없이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언니나 오빠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도 말을 놓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나보다 어린 동생들에게 말을 놓으며 마음의 벽도 내려놓는 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1년은 나와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학교에서 생활을 했고 일본 생활이 나도 처음이라 친구들에게 여러모로 많이 의지했는데 귀국 후 학기를 맞추기 위해 휴학을 해야 했고 그렇게 입학한 일본 대학원의 동기들은 현역으로 입학과 졸업을 하여 내 동생과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었다. 공모전이며 각종 시험, 자원봉사에 세계일주까지 계획해 척척 해내는 K-대학생들 사이에서 온 나는 기본 템플릿의 PPT만을 만드는 동기들이 다른 의미로 놀라웠고 그 친구들도 여태껏 본 적 없는 화려한 애니메이션의 K-PPT를 보고 신기해했다. 한국은 대체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 거냐며.


시간이 지나 입사 후 만난 동기에게도 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언제나 언니 혹은 누나의 롤을 충실히 수행해가며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응원단장을 자처했다. 이런 내 성향이 극대화된 게 바로 회사의 엘더(elder) 제도인데, 한국의 멘토링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나도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같은 부서의 선배가 업무를 포함해 사회인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매너, 예를 들어 전화응대나 고객을 대할 때의 자세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에겐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일본어를 포함해 야구의 룰이나 팬덤 이야기까지 정말 다양한 부문에서 서포트를 해주셨다. 물론 엘더 이외의 선배사원들 역시 내가 손을 뻗으면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1년간 나의 성장을 지켜봐 주었다. 이런 엘더의 역할이 입사 다음 해에는 나에게 맡겨졌는데 당시 부서에서 심신이 지쳤던 나는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귀여운 후배 K짱이 나처럼 힘든 상황에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언니의 마음으로 가능한 내가 쳐낼 수 있는 가시밭길의 가시를 쳐내려 했다.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버텨준 병아리처럼 귀엽기만 한 K짱은 몇 개월 후 내가 이동된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직접 손편지까지 써서 내 서랍에 넣어주었다. 이렇게 귀여운 후배를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엘더 제도가 아니어도 매년 3~4명씩 입사하는 공채 후배들은 언제나 귀여운 동생들이자 동료로 눈 마주치면 한 마디라도 더 걸고 싶고 괜히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중에 나처럼 스포츠 비즈니스에 뜻을 품고 회사에 입사했던 두 기수 아래의 T군이 식음파트 중에서도 점포개발 쪽에 특화된 부서로 이동을 한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다양한 부서 연수를 경험하며 우리 부서에 오고 싶어 했던 T군은 공식 배정 후 축하 겸 단합대회의 술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부서에서 과장님과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눈물과 함께 소감 발표를 했다. 과장님과 베테랑 선배 그리고 나, 3명의 작은 부서였기에 T군의 엘더는 예상대로 내가 하는 것으로 결정 났는데 나처럼 규슈 출신도 아니고 스포츠 비즈니스에 관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여서 비슷한 처지인 동기 N군과 함께 비 규슈 출신 멤버끼리 자주 식사도 하며 후쿠오카 적응 팁을 나누기도 하고 친구가 많지 않은 셋이 함께 놀기도 많이 놀았다. 집 가는 방향이 같아 같이 집에 가자며 내가 끝날 때까지 옆자리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공사로 난방이 들지 않아 춥다는 말을 계속 뱉어냈던 어느 날은 편의점에 갔다 오는 길에 손난로를 사 오는 센스를 발휘해 많은 누나들을 심쿵하게 했다. 남동생이나 아들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며 마냥 귀엽기만 한 T군의 성장이 우리 부서의 기대이자 나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돔이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를 하며 거의 모든 부서가 참여하는 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내가 식음매장 전체를 담당하는 업무를 맡기로 하며 또 다른 프로젝트인 식음매장의 새로운 개발을 T군이 담당하는 것으로 당분간 각자도생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가 담당했던 건 당초 식음매장의 카운터와 간판을 돔의 새로운 디자인에 맞추어 리뉴얼하는 것이었는데 점차 이야기가 바뀌더니 매대와 같이 세세한 부분까지 다 바꾸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어 십여 개가 넘는 거래처와의 조율과 동시에 계약 연장을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다른 회사라면 전문부서가 담당할 영역의 업무를 외국인인 나 혼자 담당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스스로도 불안했는데 이런 나의 걱정과 동시에 회사에서도 부동산 디벨로퍼라는 사업을 키워나가려 하는 타이밍에 리징(소유 건물 내에 입주할 점포를 유치)을 전문으로 하던 경력직이 입사를 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다시 한번 조직개편이 있었는데 회사의 남동생이자 아들과 같은 T군과 내가 다른 부서로 나뉘게 되었다. 그의 업무인 스포츠 펍 프로젝트는 식음메뉴 개발도 꽤 중요한 비중이었기에 디벨로퍼가 메인인 나의 새 부서와는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입사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큰 프로젝트를 홀로 떠안게 된 T군이 걱정되어 과장님과 정기 면담을 하던 인사부에 여러 번 T군이 홀로 다 이끌기에는 아직 버거우니 다른 사람과 함께 일 할 수 있게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달했다. 시간이 흘러 기존의 오프시즌 준비 업무에 돔 리뉴얼 업무까지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업무는 두 배 이상이 된 회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눈앞의 업무를 하나씩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T군을 제대로 보지 못해 T군과 같은 부서가 된 다른 선배에게 서포트를 부탁했더니 선배 N상이 T군이 M상도 본인 일로 바쁠 텐데 자기 신경 쓰지 않게 열심히 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줬다. 코 끝이 시큰했지만 모두가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잠깐이라도 다 같이 모일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T군이 인플루엔자로 며칠간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매년 유행하고 있던 독감이겠거니 다음 주에 나오면 점심이라도 같이 먹어야지 했지만 T군은 그렇게 당분간 휴직을 하게 되었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도 아픈 상태라 휴식이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진행된 인사부와의 정기 면담에서 신입사원을 담당하던 K상은 "M짱이 말한 대로였네"라며 열불 난 내 마음속으로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래서 여러 번 부탁했던 건데......


와이파이와 의자가 있다면 어디서든 노트북을 꺼내 일을 했다.

상황은 안타깝고 너무나 슬펐지만 현실적으로 T군이 맡던 일을 누군가가 빨리 뒷수습을 해야 했다. 돔 리뉴얼 프로젝트의 상징적인 공간 중 하나이기도 했고 이미 함께 하기로 한 거래처와 우리 회사의 높으신 분이 이야기를 진행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타로 내가 지목되었다. 식음매장의 계약부터 공사 그리고 메뉴 개발과 마케팅까지 경험해 본 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없어도 돌아가야 하는 게 회사니까 이탈된 경로를 바로잡고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가 하던 업무는 마무리 작업 정도만이 남아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나는 중간에 멈춰있던 프로젝트의 조각들을 모아 복구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기도 했고 솔직히 T군이 밉기도 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들이 윗선의 판단을 기다리느라 지체된 것이 많았고 거래처의 담당자도 그 부분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큰 프로젝트를 홀로 이끌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T군의 압박감도 이해가 되었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며 상황이 파악되었으니 나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식음파트에서 지지부진하던 프로젝트를 맡아 마지막 끝판왕처럼 여러 개 해치워가며 선배들은 나를 불도저 M짱이라 불렀고 이번에야 말로 불도저가 되어야 했다. 먼저 거래처에 솔직한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 내가 일대일로 바로 대응할 테니 우선순위부터 함께 정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야구가 끝난 오프시즌인 12월, 1월, 2월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었지만 12월은 매주 콘서트가 있어 대관으로 인해 일주일 내내 출입이 불가능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파악해 시설관리부서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가능한 후보일을 여러 개 받아 조율을 진행해 나갔다. 동시에 거래처와 계약서 내용과 점포 운영 그리고 메뉴 개발 등 운영 면의 조율도 필요하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당일치기로 도쿄에 출장을 다녀왔다. 첫 비행기로 도쿄에 도착해 마지막 비행기로 후쿠오카에 돌아왔다. 몸은 너무나도 지쳤지만 지금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더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T군에게 제대로 만들어진 매장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나에겐 구단 오리지널 맥주를 개발하며 익혔던 지식과 경험이 있었고, 함께 하기로 한 스포츠 펍은 대학원생 때 연구실 사람들과 자주 갔던 곳이라 브랜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무기는 나의 맥주사랑. 런던 여행 갔을 때 혼자 겁도 없이 펍에 가서 파인트를 주문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정통 영국식 펍을 표방하던 거래처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고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거래처라기보다는 최종 퀘스트를 함께 깨는 팀이 되어 갔다.


스타디움 덕후에게는 하루 종일 쳐다봐도 질리지 않는 텅 빈 그라운드
코로나19로 현재는 보지 못하는 7회 말 시작 전의 노란 제트풍선을 날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하나  자재가 들어오고 가게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매장을 채우고 고객에게 전달할 이야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기존 영국식 펍이 축구나 럭비를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그걸 야구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나눴는데, 내가 가장 어필하고 싶었던  우리가 새롭게 선보이는 매장의 가장  포인트는 언제나  창문으로 돔의 내부가 훤히 보이는 펍이라는 점이다. 스타디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만원 관중의 뜨거운 스타디움도 사랑하지만  많던 관중이  나가고 아무도 없는 차가운 스타디움의 적막도 나름의 낭만이 있어  좋아한다. 나는 구단 직원이니 내가 보고 싶을  언제나 스탠드에 올라가 그라운드를 바라보거나  천장을 보며 소소한 힐링을 했는데 일반인은 이런 풍경을   없으니 이런 부분을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시합 없는 날의 스타디움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나누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메뉴 구성을 생각하며 다른 구장을 살펴보니 내가 사랑하는 바로  포인트가 우리 구장에서 밖에   없다는  알게  순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본 12 구장 중에서 우리 밖에 못하는 , 그리고 가장 처음이자 유일한 시도를 내가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프로젝트에 발을 들였을  얼른 해치우고 나가자 하는 마음이 컸는데 어느새  프로젝트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가득 생겼다. 우리 팀을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주시는 팬들과 함께 내가 느낀 멋진 시간들과  경험을 함께 나눌  있음이 감사하고 기뻤다. 입사 이래 정말 일에 미쳐 즐겁게 고생을 하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일에 대한 모티베이션도 입사 이래 최고였고 몸은 힘들었지만 빨리 내가 했던 일들이 눈으로 보이는 성과로 나오기를 바라고 기대했다.


무사히 오픈 파티가 시작되고 한 숨 돌렸다.

여러 번의 고비와 즐거움의 고통을 지나 멀기만 해 보였던 봄이 찾아왔고 모두가 힘들거라 예상했던 일본의 황금연휴인 5월 초 골든위크에 가까스로 정식 오픈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M짱의 펍으로 유명해질 만큼 펍과 관련한 일이라면 모두가 나에게 연락을 줬는데 그만큼 거의 모든 부서에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며 만들어간 매장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부서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기에 오픈할 수 있었고, 입사 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동료들이 생긴 것에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계를 돌려 매장 오픈 후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후배 T군은 그 후 꽤 오래 방학을 갖게 되었고 시즌이 끝나기 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는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다. 나야말로 조금 더 신경 써주지 못했던 선배이자 누나로서 미안했는데 자신의 부재로 모두가 고생을 했다는 생각에 돌아와서도 이전처럼 잘 웃지는 못하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농담으로 네가 두고 간 거 내가 불도저로 다 밀고 가게 만들었으니까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는데 매장에 가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의 사과는 끝이 없었다. 결국 T군은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돔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 퇴사를 결정했다고 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어 모두 아쉬운 마음이 컸다.


날 좋은 봄날, 벚꽃과 돔을 보며 점심을 먹는 게 즐거움이었다.

그 이후로 다른 후배들도 하나 둘 퇴사를 결정하며 돔을 떠났고 나도 돔을 떠나면서 마지막 송별회를 이 매장에서 해달라고 부탁할 만큼 나에게는 힘들었지만 성장할 수 있었고 그만큼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였다. 다행인 것은 이 매장은 큰 문제가 없다면 아마 2029년까지는 영업을 계속할 테니 머지않아 하늘길이 열릴 즈음 다시 한번 내가 사랑하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을 거다.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히기 전에 우리 가족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었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던 내 구단 생활의 손꼽는 보물과도 같은 곳. 텅 빈 그라운드를 보며 뜨거운 피시 앤 칩스와 기네스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귀여운 후배와 동료들 그리고 벚꽃이 피기 시작할 돔을 그리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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