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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이 Mar 24. 2022

의외의 인연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라.

7회 말_아시아 야구가 이어지는 방법

회사의 미래를 좌우할 신규사업을 담당하는 나의 새로운 부서는 회사 내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 가고 싶은 부서 중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산 달성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게 일반적인 업무 스타일이었다면 신규사업을 담당하는 곳에서는 예산을 집행하는 게 일이었다. 그것도 지금껏 한 적 없는, 최신의 그리고 최고의 콘텐츠를 찾아 직접 실현시키는 게 업무였다. 그렇기에 비교적 평균 연령이 낮은 부서였지만 공채 출신은 없었고 모두가 경력직으로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내가 공채 출신으로 처음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서에 가게 되어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업무를 맡게 되어 설렘과 동시에 막막함이 가득했는데 평소에 해외업무 대응을 도와드리며 친분을 쌓은 실장님과 선배가 있어 든든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가 나고 든든한 울타리는 사라졌다. 함께 일할 줄 알았던 선배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고 새로운 상사인 실장님은 갑자기 건강상의 문제로 큰 수술을 받게 되셨고 한 달 정도 나 혼자 낙동강 오리알처럼 낯선 부서에서 낯선 업무를 해내야 했다. 여러 명의 선배들과 백여 명의 아르바이트 스태프를 관리했던 첫 부서에서 과장님과 선배 그리고 나라는 단출한 구성원과 십여 명의 각 점포의 점장님들과 복작복작하던 생활에서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조직과는 정말 정반대였는데 나의 상사인 실장님과 나, 단 둘이서 팀을 꾸리게 되었다. 그리고 실장님은 우리 회사의 유일한 여성 관리직으로 영업본부에서 십여 년간 실적을 쌓아오셨는데 남자 영업맨 동료와 부하가 대부분이었던 실장님은 여자이자 외국인인 새로운 부하가 반갑다며 병원에서 틈틈이 연락을 주셨다. 나 역시 여자 상사는 처음이었는데 전공 특성상 남학생이 많았던 연구실 생활을 보냈고 남자들의 스포츠라고도 불리는 프로야구 업계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며 무덤덤한 내 센스가 들킬까 봐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실장님의 공백기가 이어지면서 나는 전임인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바로 현장에서 대응을 해야 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중국 소년야구 클럽팀의 방문 대응이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야구에는 큰 흥미가 없었고 일본 유학생활 중에 야구부 출신인 다수의 선후배와 동기에게 코시엔(甲子園)이라 불리는 전국 고교야구대회 시즌이 되면 일본에서 야구가 가지는 의미를 지겹도록 들었고 다 같이 학교 시합의 응원을 가면서 룰도 익히고 그 재미를 조금씩 알게 된 케이스였다. 그런 나에게 한국 프로야구에 대만에서 온 꽃미남 선수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고 일본에도 대만 선수들이 많이 활약을 하고 있어 대만 야구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뜬금없이 ‘중국에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대만 사람을 중국이라고 표현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제 수준이 높은 해안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의 야구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남자아이라면 축구 혹은 야구처럼 어렸을 때부터 많이들 하는 것 같은데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야구는 장비가 많이 필요해 비용이 많이 들고 미국의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강해 미국 혹은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그리고 어느 정도 소득이 있는 이제는 초등학생의 학부모가 된 유학파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많이 시킨다고 했다. 이야기를 좀 더 파고 드니 미국의 MLB는 이미 십여 년도 전부터 중국 각지에서 유소년을 위한 야구 체험 이벤트 혹은 작은 리그를 운영해왔다고 한다. 조금씩 이야기를 듣다 보니 꽤 규모가 큰 비즈니스를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여름, 중국에서 온 꼬마들은 이제는 일본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코시엔을 직접 관람하고 싶어 땡볕 아래의 코시엔을 경험하고 신칸센을 타고 후쿠오카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인생 첫 돔구장과 프로야구선수를 눈앞에 두고 설레는 맘을 감출 수 없어했다. 보통 시합 전의 공식 연습은 스탠드에서 팬클럽 한정으로 견학할 수 있게 일부 좌석만 미리 문을 여는데 꼬마 손님들은 특별히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 관계자 입구를 통해 직접 그라운드에서 견학을 할 수 있게 준비를 해놨던 것이다. 안전문제도 있어 4~5명씩 인원을 나눠 선배와 내가 함께 인솔해서 그라운드로 내려갔는데, 나에게는 일상인 풍경들을 반짝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고등학교 때 제 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웠고 대학원에서 박사 선배에게 혼나가며 동기와 들었던 중국어로 열심히 인사도 하고 안내를 했더니 내가 중국어를 잘하는 줄 알고 몇몇은 나에게 질문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음식 주문에 최적화된 중국어라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꼬마 손님들의 기념사진도 열심히 찍어주고 관람을 위해 스탠드에 자리를 안내해주고 비로소 첫 업무가 끝났다. 내가 그랬듯 야구를 그리고 돔을 알아가는 즐거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 뿌듯하고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 건강한 모습으로 실장님이 드디어 복귀하셨고 그간의 업무를 공유하며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함께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장님은 유일한 여성 영업직으로 영업부서에서 오랜 기간 높은 실적을 자랑하며 회사에서 꽤 유명했는데 그 유명세에 붙지 않아도 될 소문도 함께 붙어 내가 이동할 때 많은 이들이 걱정이란 이름의 참견을 하곤 했다. 직접 만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 걱정들은 속 좁은 사람들의 질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보수적인 규슈지역에서, 여전히 여직원의 더그아웃 출입을 금하는 팀이 있을 만큼 남자들의 벽이 두터운 프로야구 업계에서 자신이 유일한 여성 영업직이기에 오직 숫자로 실력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아웃풋을 내야 했고 그제야 겨우 회사가 인정해주셨다고 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큰 딸과 한 살 적은 둘째 딸이 있는 정말 엄마와 같은 분 이셨는데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좋은 기회가 될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제안해 달라고 해주셨다. 더불어 자신은 매운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며 조만간 한국음식 먹으러 가자는 말도 함께.


기존의 업무를 하면서 나도 추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한국 쪽을 알아봤다. 20대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낸지라 한국야구계에 인맥이라고는 없었던 나는 입사 전에 한일 야구계 취재를 오랜 기간 해오신 분을 뵐 기회가 있어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 여쭤봤던 적이 있다. 당시 NPB에는 한국 선수가 거의 없었던 상황이고 모 구단에 한국지역 스카우터로 재일교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이름을 가진 분이 계시다고는 들었지만 나처럼 비즈니스 쪽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대답을 들었다. 내가 퇴사할 때까지 코치나 트레이너 쪽을 제외하고는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지금도 없을 것 같은데 그만큼 수가 적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NPB 구단에 한국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대학원 진학부터 구단 입사까지 모든 걸 스스로 알아보고 준비했던지라 가능하면 후배들에게는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어서 가끔 멘토링처럼 자리를 가지곤 했는데 이를 준비해주셨던 지인의 제안으로 기사가 한 번 났던 게 파급력이 있었던 것 같다. MD 업무를 했을 무렵 모 구단의 마케팅 담당자님께 연락을 받았던 적도 있고 당시 우리 팀이 매년 한국으로 3군 원정을 떠났는데 그때마다 팀을 경유해 연락을 받기도 했고, NPB 혹은 모기업을 통해 다양한 구단의 담당자님들과 연락을 할 기회가 있었다. 창피하게도 한국의 야구 사정을 잘 모르는지라 나는 많은 것을 물어보며 배우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드릴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그 이상으로 찾아봐드렸고 직접 돔에 오실 때면 반가운 마음에 정말 버선발로 돔의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바로 코 앞이 부산이지만 외국은 외국이라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쌓아온 인연들과 이야기를 하며 당시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이와 관련한 기획이나 고교야구, 우리 팀의 2군 시설을 활용한 프로그램 등 말로는 이미 한일 프로리그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모 선수는 내 명찰을 보고 한국 사람이냐며 개막 전에 누구를 만나러 갔다 왔다고 한국음식이 맛있었다고 말을 걸어주기도 했고, MLB에서 일을 하다 온 GM보좌역의 선배는 한국 모 구단의 GM과 막역한 사이라며 선수들 보러 한국 자주 갔다고 다음에 같이 시간 맞춰서 가자고 이야기할 만큼 한일 야구계가 이렇게나 이어져 있다는 것이 괜히 뿌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예전부터 다들 이어져있었지만 일반인의 한 사람으로 목격한 풍경이 훈훈하기 그지없어 앞으로 이 사이를 더 견고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맘대로 결의를 다지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소위 NO JAPAN이라고 불린 일본 불매운동 소식이 일본까지 들려왔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이유로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에겐 마음 한 구석 어디엔가 죄책감이 쌓여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돌덩이는 더 무거워지곤 한다. 여름휴가의 끄트머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판매가 저조한 외야 응원석(일본 야구는 내야에서의 응원이 금지되어 있고 외야에서만 일어서서 응원이 가능하다.)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면서 일본의 야구 응원의 아이콘과 같은 제트풍선이라는 하늘로 날리는 풍선을 선물로 주고 있었다. 한국 선수는 없었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팬, 돔과 응원하는 분위기를 즐기는 여행객들에게 꽤 인기를 끌며 한국 고객도 많이 있었는데 더위가 한 풀 꺾이며 NO JAPAN의 영향으로 예약 취소가 줄을 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후쿠오카의 많은 관광업소가 직격탄을 맞았는데 회사 직원으로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나 일본에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번 불매운동이 회의자료에 등장할 만큼 큰 주목을 받고 있어 복잡한 심경이었다. 당시 후쿠오카에 방문하는 외국인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는데, 돔을 찾는 외국인은 대만인이 더 많았던 것도 있고 일본에서 대만은 친일 이미지가 강해 회사에서는 바로 대만을 주요 타깃으로 수정하는 계획안을 채택했다.


사실 팀이자 회사의 회장님의 출신이 대만인 것도 있고 예전에 여러 번 팀이 교류를 한 적이 있어 대만에서 우리 팀의 인지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입사 후 후쿠오카에서 출발하는 얼마 없는 국제선 노선이기도 했고 교환학생 때 친구가 타이베이에 있어 겸사겸사 가 본 적이 있는데 서울과 도쿄, 홍콩을 절묘하게 섞은 것 같은 도시의 분위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친절하게 주문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처음 보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행운을 빈다며 사찰에서 따뜻한 인사를 건네준 대만 사람들은 얼른 공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고 싶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와 같은 시기에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왔던 동갑친구 G짱은 오랜만에 만난 기색 없이 반갑게 타이베이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줬고 그녀가 일본에서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대만식 아침식사를 파는 가게에 데려가 줬는데 덕분에 대만에 출장을 갈 때마다 매일 아침 호텔의 조식을 마다하고 주변의 조식 가게를 찾아가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대만 야구팀의 굿즈샵을 찾아갔지만 대만 프로야구리그(CPBL) 사무실이 등장했다.
친절한 F상의 안내로 찾아간 굿즈샵은 당시 우리 매장보다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상품군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첫 대만 여행의 새로운 만남이 또 있었는데 신기할 만큼 우연이 겹쳤던 대만 프로야구리그(CPBL)의 F상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열혈 신입사원이던 나의 실수에서 시작되는데, 당시 MD담당이던 나는 대만도 프로야구가 인기라던데 거기 MD는 어떤가 싶어 가기 전에 검색을 해봤다. 안타깝게도 타이베이 근처에서 시합은 없었는데 굿즈샵이라면 구경은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한국에는 정보가 없는데 일본 야후의 지식인과 같은 코너에 주소가 있길래 지도에 저장하고 짐을 풀자마자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굿즈샵 같은 가게는 보이지 않고 지도를 따라가니 그냥 평범한 오피스 빌딩이었다. 망했다 싶었는데 안내판에 CPBL의 사무실 같은 곳이 있길래 한 번 가서 물어보자 싶어 올라가 봤다. 갔더니 역시나 그냥 오피스 플로어였고 그곳은 CPBL의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싶었는데 구석에서 일본어가 들려와 말을 걸었더니 나랑 비슷한 상황의 일본인이 있었고 CPBL에서 국제업무를 담당하는 F상이 리그에서 판매하고 있는 굿즈를 보여주고 있었던 거다. F상은 교토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한 적이 있어 일본어가 유창했기에 안내를 위해 나와주었고 예전에는 리그 차원에서 소량이지만 판매를 했지만 얼마 전부터 각 구단에서 굿즈샵 혹은 온라인으로 판매를 하고 있다며 가까운 굿즈샵을 안내해줬다. 이것도 인연이니 한자로 ‘야구 사랑해요’라고 적힌 비행기 태그를 구매했고 F상에게 사실 나는 일본 구단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이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몇 번의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 F상과는 몇 년 뒤 우리 돔에서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일본의 야구 대표팀과 대만 대표의 시합 때 재회했고 그 이후로는 라인을 교환하며 종종 각자 리그의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내가 해외마케팅을 담당하게 되면서 대만 구단과의 협업이 늘어 종종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대만의 파트너들과 F상은 안면이 있는 사이기도 했고 나중에 알게 된 대만 파트너 중에는 한국의 모 구단에 자주 간다며 내가 아는 한국의 구단 관계자와도 아는 사이였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 밖에도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아시아의 야구인들은 한 다리 건너 서로 아는 사이인 경우가 많았는데 나처럼 대만 구단에서 일하는 일본인 직원을 만난 적도 있고 후배를 통해 중국과 대만의 야구계를 잇는 인물과 우리 팀을 연결한 적도 있다.


매년 열리는 12 구단 그리고 구장의 정기모임은 반가운 만남과 공부의 장이었다.

흔히 스포츠는 국경도 종교도 정치도 뛰어넘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현업에 있다 보면 생각보다 그 정도가 깊고 넓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NPB의 12 구단은 매년 각 분야별로 구단 그리고 구장 관계자들끼리 워크숍처럼 공통의 테마를 가진 회의를 진행하며 그 기간 중에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모션도 탄생하고 반응이 좋았던 건 공유하면서 더 많은 즐거움을 팬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스타디움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각 구장은 고유의 멋과 사랑스러운 포인트가 다 다른데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니 어찌나 즐겁던지. 일본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팀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경험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만남은 생각보다 큰 자극이었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는 구단 그리고 구장을 만들고 싶었다. 업계의 대선배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벅찬 감동과 배움의 연속이었다. 


한국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시장이 나눠진 연고지 제도에서 각 구단은 고객 뺏기보다 고객의 총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논의했다. 더 이상 프로스포츠 구단의 라이벌은 각 구단, 다른 종목이 아닌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각 영역임을 인지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했다. 콘텐츠가 국경을 넘는 게 자연스러워진 요즘, 스포츠라고 안되리라는 법은 없다. 미국과 일본의 야구계는 이미 중국을 넘어 동남아에도 눈을 돌리고 있고 아시아의 야구인들은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끈끈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야구를 사랑함은 국경을 뛰어넘는다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퇴사 전에 이야기했던 프로젝트가 실현된다면 얼마나 재미날까? 하늘 길이 열리고 아시아의 이곳저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옛 동료들과 함께 스타디움에서 재회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개막전 준비로 바쁠 그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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