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

by 이지하

언제부터인지 인터넷상에 ‘손절’이라는 표현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20년 지기 친구를 손절했어요.’, ‘이런 사람은 손절해야 할까요?’와 같은 식이다. 가지고 있는 주식을 손해를 감수하고 판다는 기존 의미가 확장되어 요즘은 사람 간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말. 손절이라는 말이 경제 용어에서 시작되어서일까? 이 표현은 절교라는 말보다 어쩐지 더 냉정하고 단호하게 들린다.


딸아이가 단짝 친구에게서 ‘손절’을 당한 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만나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이였다. 이전까지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던 아이는, 모처럼 한껏 정을 주었던 친구로부터 멀어지자는 통보를 받자 한동안 쓰린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나는 아이가 새 학년이 되어 다른 인연을 맺고도 수시로 그 친구와의 추억을 더듬을 때마다 못마땅했다. 상처를 준 이에게 복수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잊기라도 해야 공평한 것 아닌가.


며칠 전의 일이다. 잠들기 직전 휴대폰을 보던 아이가 문득 다음 날이 그 친구의 생일이라고 했다. 자신과 관계를 끊은 친구의 생일을 아직도 휴대폰에 저장 중이라니! 이해가 안 갔지만 길게 이야기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은 잊어. 빨리 자.’ 아이는 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잠시 후 방에 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밤 아이가 무심한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전날 밤 그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아이는 말했다.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생일을 축하했으며, 친하게 지내는 동안 자신의 까칠한 성격을 고치도록 여러 말을 해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듣기 싫었던 친구의 말이 사실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에서 나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며, 생일 선물과 카드를 전할 주소도 물어보았다고 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아이에게 연달아 물었다. ‘문자에 답장이 왔어? 주소를 받았어? 그래서 집 앞으로 간 거야? 선물을 줬어?’ 학원 수업이 끝나고 불쑥 친구의 집 앞으로 찾아간 아이는, 마침 집에 있던 친구의 동생에게 생일 카드와 쿠키를 전하고 왔다고 했다. 쿠키라는 말을 듣자, 나 역시 일 년 전 아이가 친구와 나눴다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생일 선물로 맛있는 쿠키를 받고 싶다고 했었다.


아이가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서는 지난 일 년간 침묵했던 두 아이가 대화하고 있었다. 마침 전날 아이의 꿈을 꾸었다는 친구는 함께 보냈던 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너무 많은 잔소리를 한 것 같아 후회했는데 좋게 받아들여줘서 고맙다고 했다.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자는 조심스러운 화해의 말과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는 말이 오갔다. 밤늦게 귀가해서 깜짝 생일 카드와 선물을 확인한 후 뭉클했을 친구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아이는 모처럼 친구와 대화를 나눈 후 행복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 전개를 들은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제야 나는, 왜 아이에게 친구를 잊으라고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누군가와 쉽게 연결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덧없이 끊어지기도 하는 SNS 상의 관계처럼, 아이의 일상 속 인간관계가 칼처럼 잘리기를 바란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지 내가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아이의 미래를 넘겨짚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헤어진 연인과는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듯, 손절을 통보한 친구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받을 상처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혹시나 아이가 친구에게 다시 다가갔다가 더 큰 상처를 받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나 또한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요동치는 마음을 마구 투사하는 엄마를 둔 아이는 다행히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밀고 나갔다. 1년 넘게 대화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생일축하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런 용기를 내본 적이 있었던가? 애써 기억해내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손절되었던 관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한 아이가 놀랍고 대견하다. 작은 일에도 노심초사하는 내게 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 엄마의 마음에 인 격랑을 아이가 잠잠히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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