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이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얼마 전 학교에서 사고로 앞니를 다친 나는 한 잔의 술도 마실 수 없었다. 술과 더불어 노래방에서 점프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이 상황이 속상하기 짝이 없었다. 모임 도착 전 강제 금주 소식을 알리고자 부상을 소재로 쓴 글을 단톡방에 공유했다. 탄식 섞인 반응이 올라왔다. ‘진짜로 일어난 일이냐, 어쩌다가, 그런데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 (나라는 대답에) 이게 무슨 일이냐’까지...
잠시 후 식사 자리에서 우리는 그간의 근황과 일터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관리자의 폭언에 속을 끓이며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를 함께 읽은 일화는 십 년이 지나도 매번 등장하는 추억담이었다. 평교사였던 우리가 어느덧 부장이 되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상념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물었다. 오는 길에 내가 올린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그런데,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흥성거림 속에 받은 그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질문한 이는 무례하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잠시 말문이 막혔던 건 지금껏 누구도 그 질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관심사와 동떨어진 분야에 몰두한 이들을 보며 내가 품었던 의문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잦은 부상에도 끝없이 링에 오르는 격투기 선수나, 고도가 높은 산을 숨이 차도록 올라가는 등산가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
그의 질문이 주말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쓰는가.
소설가도 극작가도 시인도 아닌 나는, 하루키처럼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그냥 글쓰기'를 하고 있다. 떠오르는 생각을 휘리릭 써서 SNS에 올리던 예전과 달리, 고작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쓰기 위해 주말 약속을 줄이면서까지 반나절 가까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런데, 내가 쓴 문장 안에 머무는 시간이 싫지 않다.
사진 몇 장이나 말 몇 마디로는 금세 휘발되었을 법한 순간들이 글이 되는 순간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 문장을 고쳐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보면 모호했던 감정이 모양을 갖추고, 정돈되지 않던 생각 또한 정리된다. 어쩌면 지난하고도 번거로운 듯한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내면이 조금 더 차분해지고 단단해졌음을 깨닫는다. 읽어주는 이도 많지 않은 글을 천천히 다듬으며 나는 조금씩 나를 찾는다.
가끔은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내 꿈은 환갑 전에 책 한 권을 내는 것이라고. 그 말이 실현될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글을 쓰는 동안의 나는 적어도 삶을 무작정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 내 속도에 맞게 꼭꼭 씹으며 음미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쓰려한다.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의 나는 덜 흐릿하고 조금 더 선명해지니까. 어쩌면 글쓰기의 이유는 거창한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 더 나다워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쓴다.
(글의 제목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