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출 후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왔다. 자정 이후에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고민하다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들어갔다. 내 방은 꽤 높은 층에 있었는데 그곳까지 가려면 계단 대신 각 방 천장의 환기구를 열고 한 층씩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다들 자고 있는 방을 도둑처럼 뚫고 지나가야 하다니 이게 무슨 민폐인가. 몇 층 지나 어떤 방을 통과하려는데 그 방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듯한 그들은, 가는 길이 너무 험난하다는 내 말에 잠시 회의를 하더니 제안했다. 자신들 중 한 명이 내 방에 대신 올라갈 테니, 나는 여기 남아 다음 사람을 위해 문지기, 아니 환풍구 지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2. 지친 몸으로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는데 ‘불한증막’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날도 쌀쌀하니 이참에 몸을 녹여볼까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샤워기가 두 개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런 빈약한 시설로 손님을 받으려 하다니! 사람이 바글바글한 탈의실에 멍하니 있던 내게 주인이 말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잘 보이면 씻을 수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일단 마른 두피에 샴푸를 묻혔다. 물기 없이 머리를 문지르니 손끝에 닿는 질감이 뻣뻣했다. 대기 줄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고작 샤워기가 두 개뿐인 채로 손님을 받은 주인에게 화가 치밀었다. 온 힘을 다해 항의하려는데 목소리가 콱 막혀 나오지 않았다.
#3. 1년 전 다리에 화상을 입은 딸아이가 정기 진료를 받은 날이었다. 치료 후 양쪽 다리에 거즈를 붙인 채 엉거주춤 걷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조금이라도 덜 걷게 하려고 집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호출 화면에 신중하게 탑승 장소를 찍었는데 4분 후 도착한다던 택시가 7분이 지나서야 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있는 곳을 쌩하니 지나치더니 한 블록을 더 가서야 멈춰 섰다. 이럴 거면 택시를 왜 불렀나. 화난 것을 티 내려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비틀대고 서 있던 딸아이가 갑자기 택시를 향해 치타처럼 달리는 게 아닌가. 덩달아 뛰기엔 왠지 지는 것 같아 꿋꿋이 걸어가 택시에 올랐는데, 기사는 말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앞의 두 이야기는 지난 며칠간 내 꿈에서 일어난 일이고, 마지막 이야기는 주말에 실제로 겪은 일이다. 공통적인 것은 어디에서도 나는 곤란했고, 엉뚱하게 벌어지는 상황에 약간은 억울했으며, 일견 사소할 법한 일이 이상하게 나를 붙잡고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잠을 자고 있을 때도 깨어 있는 동안에도 도무지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지난주 수능 감독으로 쌓인 피로가 내 무의식에 스며들어, 잠들어 있던 순간까지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말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운 채 보냈다. 이틀 동안 단순히 먹고 잠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천천히 몸에 힘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동안 출렁였던 마음도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득, 잠시 바깥공기를 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밖을 나와 숨을 들이마시자 차가운 공기가 몸 안에 스며들었다. 며칠 전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샛노란 잎을 가득 품은 은행나무는 쨍한 하늘 아래 단단히 서 있었다. 바람이 스치자 물결처럼 흔들리던 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주에는 보지 못할 풍경이라 생각하자 문득 눈물이 고였다.
은행나무가 잎을 모조리 비워낸 후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듯, 나 역시 고단한 시기를 보낸 후에야 다시 숨을 고르고, 주변의 빛나는 것을 바라볼 힘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오늘, 천천히 - 그러나 분명히,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걸어 들어갈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