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먹고살기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간 드러누워 있다가 번역본 교정교열 작업을 위해 데스크 앞에 앉았습니다. 막상 앉으니 일하기 싫어져(?)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다시 일하러 가야 하니 글은 조금 짧게, 간결히, 핵심만...!
제가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시작한 건 영상화에 적합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뒤입니다. 학부 때 연극 영화를 복수 전공하기는 했지만, 영화사나 연극사, 혹은 장르론이나 연출법 등을 위주로 배웠기에(그런데도 아는 것은 없습니다) 서사 창작과는 거리가 좀 있었거든요.
아이를 키우면서 대학원을 다닐 수는 없으니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적더라고요? 자소서와 면접을 거쳐야 하는 곳은 일단 일차적으로 걸렀습니다. (그렇게까지 열정적인 곳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전임교원을 꿈꾸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홀로 교양 공부하겠다고 진학한 사람 같잖아요...)
대신 교수자의 개인적 호불호가 강하게 드러나는 피드백보다는 상업성에 포커스를 두는 코멘트를 주는 곳, 커리큘럼이 체계적인 곳을 수소문했지요.
매년 공모전 수상자를 배출한다는, 모 감독님의 수업을 찾게 되었고, 친분 있는 작가님까지 꼬드겨(?) 함께 등록했습니다. 호기롭게 등록했지만, 사실 개강 첫 주에 일이 생겨 수업을 빠졌답니다.
차주 수업을 듣기 전, 같이 듣는 작가님에게 이렇게 여쭈었거든요? 지난주 수업 때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셨냐고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사극이나 스릴러를 쓰려는 이들은 이 수업을 듣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니? 나는 그런 것만 쓰는 사람인데?
일단 사극은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 신인에게 최악의 수(?)이고, 스릴러나 미스터리는 작법이 아예 달라 이 수업에서 다뤄줄 수가 없다는 거였지요.
첫 주부터 부정(?)당하기는 했지만, 수업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나름 많은 걸 배웠거든요.
몇 년이 지난 뒤 OTT(ex: 넷x릭스)가 급부상하면서 장르물 니즈가 커졌고, 스릴러 장르와 결합한 복합장르 창작을 목표로 하는 수업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들으러 갔습니다.
오, 거기서도 그러더라고요.
사극은 안 된다고.
(자꾸 부정당하는 저의 작가 정체성)
사극은 PPL을 넣기 힘드니 이해는 합니다.
제작사에서 싫어하겠지요.
리스크가 너무 크니 신인 작가를 믿고 제작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작가를 키우는 학원에서, 그것도 첫 단계에서부터 사극은 안 돼, 라고 못을 박으면 제가 좋아하는 사극은 대체 누가 써준단 말입니까.....?
제가 예전에 로맨스의 탈을 쓴 의학 소설을 번역한 적이 있거든요.
(마침 위에 언급한 사극과 스릴러는 안 된다, 라고 했던 수업을 듣던 시절)
병원 ICU가 주된 배경이었지요. 이 작품은 중국에서도 바로 드라마로 제작되었답니다. (다만 광전총국의 방영 허가가 나오지 않아 몇 년째 흙오이로...) 이 글을 번역하면서 정말 매일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습니다. 현직 외과 의사가 쓴 소설이라 디테일이 정말 엄청났거든요. 문제는 그 디테일이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거지요.
의학용어부터 (차라리 영어라면 편했을 터인데 중국은 서구 의학용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번역해서 쓰더라고요.. 중국 사이트와 한국 사이트를 매일 검색하며 실제로 필드 사람들이 이 말을 어떻게 쓰는지를 찾느라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캐릭터들의 대화까지(직장이니 상하관계도 따져야 하고 캐릭터 성격과 대화의 맥락도 고려해야 하지요) 정말 너무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극 창작도 이러하거든요.
출판사가 저에게 의학 소설을 청탁할 수 없듯, 사극을 읽지도 보지도 않던,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사극을 쓰기는 힘들지요.
결국 “언어”로 써야 하니까요. 가장 큰 장벽(?)인 명사도 있고, 대화에도 관습과 제도를 녹여야 하지요.
이러다 사극 작가의 대가 끊기겠다는 저의 개인적인 걱정은 일단 차치하도록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사극을 쓰고 계시는 시나리오 작가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사극은 영상화가 안 되는 것인가? 를 고민하던 저에게 출판사 이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말은 제작사가 가격 낮추려 할 때나(?) 하는 말이니 그런 고민하지 말고 그냥 쓰라고요. 코로나 이후로 사람 많은 대도시에서 촬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에 가둬두고 사극을 찍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고, 아무튼 빨리 쓰기나 하라고요.
생각해보니 너무 맞는 말이더라고요.
작가인 제가 영상화가 적합한 소설을 고민하며 쓸 수는 있겠지만, 영상화를 담당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고민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지? 싶더군요. 영상화 판권을 영업하는 건 출판사이고, 그렇게 산 판권을 기반으로 영상화를 진행하는 건 제작사니까요.
원작 소설 작가의 손을 아주 멀리 벗어난 일이지요.
그래서 그냥 소설이나 열심히 썼습니다.
무엇보다 안 된다고 해서 안 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취향이 확고한 사람)
출간 후 출판사가 방송국에 판권을 판 걸 보면, 사극이라고 꼭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부국제 피칭 때 어느 제작사의 누구와 미팅했는지 출판사가 리스트 정리해서 보내줬거든요. 스무 곳이 넘더라고요... 사극도 할 수 있다...)
다만 출간한 소설이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라는 생각은 합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IP로서의 가치 덕분이랄까요. 영상화에 있어서 굳이 경쟁 상대를 따진다면 저는 소설의 경쟁 상대가 다른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라고 생각하거든요.
시나리오 작가가 쓴 대본으로 바로 제작하면 되는 것을 굳이 원작 소설의 판권까지 구매해 각색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출간된 작품이라 작품성이나 시장성이 검증되었다, 완성된 스토리라 기승전결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작 마니아가 있다 등등의 흔한 이유도 있을 터이고, 이 작품이 너무 좋아 무조건 영상화를 해야겠다, 라는 원작 작가가 소망하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사극이라 팔렸던 걸지도요.
사극을 쓰는 작가가 너무 적다 보니, 경쟁할(?) 시나리오가 적었던 걸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