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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18. 2024

[소설] 이루다 7  편을 가려내서 좋았을까요?

파멸한 세계에서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분주하게 옷매무새를 다듬는 레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침잠을 깨우는 예정에 없던 알림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오늘은 차원이 달랐다. 참 시의적절한 시기에 작정하고 지른 사고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모든 일정을 줄줄이 수정해야 하는 것은 골치는 아프지만 괜찮았다. 수습만 된다면, 며칠 밤을 못 자도 상관없었다. 야속하게 문이 열렸다.


곧게 뻗은 크림색 벽은 부드러운 곡선이 되어 아치형 천장을 이루었다. 로코코 양식의 천장에는 랜덤으로 바뀌는 홀로그램 명화가 복도 끝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능소화 넝쿨을 새긴 크림색 기둥은 누군가 지날 때마다 꽃 향을 은은하게 퍼트렸다. 여느 때처럼 창문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와 사선으로 뻗은 빛줄기는 붉은 카펫에 쏟아지고 있었다. 감상적이고 쉽게 타오르는 집주인을 닮은 복도였다.


새턴의 방은 긴 복도 끝에 있었다. 레오는 눈이 부신 빛을 통과할 때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빠르게 걸었다. 잰걸음으로 가면서 이 수습 불가 사태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절로 다리가 비틀거려 짜증이 났다. 이른 아침부터 레오가 한숨을 푹푹 쉬며 지나가자 창문을 닦거나 기둥 먼지를 털어내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일사불란하게 일을 정리하고 계단으로 내뺐다.

“레오, 들어가시겠어요?”


탐지기의 질문에 레오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화 넝쿨이 그렁그렁 달린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레오는 응접실에서 아침맞이 준비를 하는 직원들에게 나가달라는 눈짓을 했다. 제아무리 아들의 온갖 사고에 단련이 된 새턴이라 해도 이번 소식은 참을 수 없을 것이었다. 평소엔 상냥하지만, 폭주하면 심기를 거스르는 직원들을 가차 없이 잘랐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잘린 직원들이 갈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선임 직원이 새턴에게 보고하러 들어간 사이 레오는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롤러코스터 같은 새턴을 안정시킬 말들을 골라냈다. 이 집에서 지낸 지 20년, 이번 일에 레오가 머물게 될 장소가 달라지게 생겼다.

‘하필, 지금…….’ 속으로 읊조리고 있을 때 새턴을 모시고 나온 직원이 레오를 흘끔 보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방문이 열리고 새턴이 천천히 걸어 나와 소파에 앉았다. 머리 손질 중이었던 모양인지, 붉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레오? 보아하니 제 아들 일인 것 같네요. 간단하게, 요점만 얘기하세요. 사설은 집어치우고요,”

새턴은 위원회 부인들 모임에 갈 준비를 하던 참에 아들이 벌인 일을 들어야 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페르가 사라졌습니다.”

며칠 안에 잡을 수 있는 건이면 레오 선에서 처리했을 것이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어디로요?”

“정확하진 않지만…….”

“정확해지면 말하세요.”

“오늘 아침 메디움행 비행선에 탑승한 것 같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성인식까지 얼마나 남았죠?”

“3주 남았습니다.”

“가서 직접 잡아 오세요. 통행증 바로 써줄 테니.”

“죄송합니다만, 트리아스호가 메디움에 도착하면 정비 후에 파트리아로 간다고 합니다. 파트리아에서 성인식 다음 날인 5월 20일에 출발하여 메디움에…….”

“다른 비행선 없나요?”

“민간용으로는 트리아스호만 허락된 것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선을 대려면 일이 커집니다.”

“뭐, 일은 다 까발려질 텐데요.”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즐기겠죠.”

“하…. 어차피 당신이 달려오는 동안 실시간으로 까발려졌을 테고요.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일정으로 진행해 주세요. 안 온다고 버티면 죽여도 좋아요.”     


“그게…. 메인 메모리칩과 분리되신 것 같습니다.”

잠시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새턴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포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누가 봐도 뽑아버린 건데 분리는 무슨!”

새턴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응접실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차근차근 생각하려 했지만,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더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배은망덕한 놈! 이를 어찌한다? 녀석을 찾는다 해도 위원회 허락 없이 불법으로 간 해명은 어찌한다?’

‘늦어. 레오가 떠나는 건 그 애가 도착하고도 며칠 지나야 할 수 있는데. 보름? 교육 기간이라 하고 잡아 오면 인사시킬까?’

‘아냐, 이미 쫙 소문이 났는데 귀에 들어가는 건 금방이지.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아, 모임 나가지 말까. 아주 깔깔들 거릴 텐데.’

‘그나저나 칩을 얼른 끼워야 하는데. 칩이 없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 그걸 빼서 얻다 뒀을까. 설마 버린 건 아니겠지?’


어지럽게 돌아다니던 새턴이 갑자기 멈추었다. 가출로 인한 파장이 지난 20년을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환장하겠네!’     

정적이 감돌았다. 새턴은 한쪽 벽면을 웅장하게 채운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응접실은 복도와 분위기가 비슷했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벽 곳곳을 차지한 진품 그림들이었다.

- 나플레옹 1세의 대관식.

새턴은 정확히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나플레옹 사이에 서서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누가 가장 위험할까요?”

“모두지요. 페르가 메모리칩에 있는 심화 기억 없이 ‘기초 자아’ 상태라는 것을 아는 누구라도 위험인물입니다. 탐나지 않겠습니까? 칩을 찾으려 혈안이 될 테지요.”


“아니요. 저들 중에서요. 저렇게 엄숙하고 숙연하게 축하하고 있는 이들 말이에요. 보아르네에게 월계수를 내리기 전에, 그때의 표정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해요. 당황하고 경악하는 그들을 본 나플레옹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편을 가려냈을까요?”

새턴이 레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가려내서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편을 가려 보시겠습니까?”

레오는 세턴의 의중을 물었다.      


“보안은요?”

“칩에 설정된 보안 프로그램 가동해 놨습니다. 시크릿 열쇠가 있어야 칩을 가동할 수 있습니다.”

레오는 새턴이 가만히 듣는 것을 살피고는 보고를 이어갔다.

“다만, 페르가 아직 인간이 몸과 흡사한 상태의 몸인 게 걱정입니다. 성장을 멈출 때까지 인공 몸으로 갈아탈 수 없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칩을 찾지 못하거나 누군가 숨긴다면, 페르는 영원히 인공 몸으로 갈아탈 수 없습니다.”


“변수가 세 개나 되네요. 칩을 영원히 못 찾을 경우, 시크릿이 발각될 경우, 망나니가 망나니짓을 할 경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망나니의 다음 행보를 예측한다면?”

“…….”

“이해할 수가 없어요. 분명 성격 선택할 때 이성, 논리, 냉철을 택했는데, 프로그래밍되는 것도 내가 봤는데, 어떻게 저렇게 종잡을 수 없는지!”    

      



처음에 파키오인에게 자손은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부터 오랫동안 파키오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자 신인류는 살아가는 게 시시해졌다.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것도, 새로운 취미를 즐기는 것도, 메디움에 쇼핑하러 가는 것도 지루했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부부가 파트리아인에게서 인공수정한 아기를 데려왔다.

부부가 아기를 키우는 모습은 꽤나 신선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행복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너도나도 파트리아인에게 인공수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그것은 뭔가 찝찝했다. 아무리 아기 때부터 키우더라도, 나중에 평생 쓸 몸을 사주더라도, 파트리아 속성이 많아진다는 것은 꺼림칙했다. 위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하기까지 했다.

그때, YO가 나타났다. 파키오인이면서 파트리아에서 처박혀 살던 그가, 무려 100년 만에!


“파키오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오늘 ‘파트리아 인공수정 아기 반입 금지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모인 걸 모르시나 봅니다.”

A위원의 말에 B위원이 깐죽을 더했다.

“그럴 만도 하죠. 내내 파트리아에 있었으니 여기 사정을 알겠습니까?”

“이봐요. YO. 오랜만에 왔는데 유람이나 하다 가셔요.”

위원회가 웃음을 터뜨렸다. 손톱 손질에 여념이 없던 새턴만 웃지 않았다.


“어째서죠?”

YO가 웃으며 답했다.

“여기 앉아만 계시니, 파트리아 사정을 모르시나 봅니다, 새턴. 위원회 분들께서는요.”

“파트리아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제야 정리하기 좋아하는 플랑 위원장이 나섰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수는 있죠. 혁명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라니요? 무슨 그런 말을 위...위험한……”

책임지기 싫어하는 플랑이 언성을 높였지만, 새턴이 플랑의 말을 끊고 답했다.

“자유와 평등을 찾아서요?”

“하하하. 새턴.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 있죠.”

YO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위원회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희망이 없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약간의 희망을 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모두 파키오로 오겠다고 들썩이는 것보다 낫죠.”


“먼저 제 연구소에서 개발한 신상품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과거에 폐기한 인공 배아 연구를 살려 성공했습니다. 그냥 인공 배아가 아닙니다. 인공 정자와 난자를 각각 파키오인 몸에 주입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파트리아인처럼 행위를 통해 수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행위와 수정이 가능한 몸으로 바꿔야 하니 여러분은 메디움 공장에서 돈을 더 벌어들일 것이고, 인공 배아를 구입해야 하니 여러분은 또 세수를 더 확보할 수 있습니다.”


내내 삐딱했던 위원회가 모두 자리를 고쳐 앉았다. 새턴마저 주의 깊게 들을 정도였다.

“인공 배아로 태어난 아이들은 인간과 흡사한 몸으로 세포를 분열하며 성장합니다. 그 애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몸을 바꾸기 전에 파트리아에서 아이들을 뽑아와 맺어주면, 파트리아에는 실낱같은 꿈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파키오는 더 안정될 것입니다!”


“인구가 너무 늘지 않을까요?”

새턴이 걱정하자 배부를 생각에 신이 난 플랑이 답했다.

“그거야, 법으로 제한하면 되죠!”


그때는 모두가 한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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