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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영 Oct 17. 2024

[ch1] 6  나를 오래도록 기억할 센서에게

파멸한 세계에서

센서, 정말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어. 나는 추억이 없어. 남긴 것도 없어. 그래서 이별이 쉬울 줄 알았어.


어제 많은 일이 있었지. 모든 행사가 끝나고 수송차에 오르기 전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어. 부둥켜안고 눈을 맞추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당부의 말을 끊임없이 하더라. 평소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어제는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고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렸어.

나는 구석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어. 딱히 할 일이 없었거든. 그래서 가만히 땅바닥만 보고 있었어.

“혼자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어. 나는 바로 알아차렸어. 제임스 시장.

센서, 너는 알고 있었으려나? 제임스 시장 말이야. 파키오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잖아. 그래서 전혀 몰랐어. 그의 생김새를. 어제 파키오 건설 200주년을 기념해서 성인식 연설을 온 그를 봤어. 모두가 봤지. 파키오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겼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파키오에서 칭송받는 아름다운 얼굴이래. 아무튼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어.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 고개만 살짝 끄덕였지.

“내가 배웅해 줄까?”

마치 ‘사탕 하나 줄까?’ 하는 것처럼 다정하면서도 사소한 선의를 베푸는 그런 목소리였어. 난 고개를 저었어. 주목받고 싶지 않았거든. 알잖아.

“널 보니, 새턴이 왜 그리 안달 났는지 확실히 알겠다, 루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아서 속삭였어.

“루다, 네 엄마를 구해야지. 파키오로 가렴.”

더더욱 알 수 없는 문장을 남기고는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건 어떤 주문 같았어. 맹세코 단 한 번도 엄마 생각은 한 적 없었거든. 갑자기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어.

하지만, 파키오에 가면 안 된댔어. 알고 계셨을까? 엄마가 파키오에 있다는 걸? 그건 사실일까?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러셨을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헤어질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센서, 이상한 친구가 생겼어. 널 떠나 하루 만에 친구가 생겼다는 거 믿어져? 사실 나도 안 믿어져. 이름이 백구래. 키는 큰데 얼굴은 엄청 귀엽게 생겼어. 근데 말이 너무 많아. 조금 지치기도 하는데, 옆에 있으면 묘하게 그 애 말을 듣게 되는 거 있지. 네가 옆에 있었으면 쫓아냈겠지? 사람 함부로 믿는 거 아니라고.

음. 좋은 애 같아. 그렇지만 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잘 살펴볼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친구가 되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싶어. ‘친구 하자.’ 그러고는 끝인 거 있지. 참, 충고도 해줬어. 속이 상하면, 곪는대. 털어놓으면 곪았던 게 없어질까? 오래 묶은 것도? 어쨌든, 그 애 덕분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했어. 오늘 아침에.

잠에서 막 깨려고 하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나오라는 거야. 늦으면 안 된대. 시계를 보니 5시였어. 아직 1시간 50분이나 남았는데 늦는다는 게 말이 돼? 문을 열어줬더니 아직도 짐을 안 쌌냐고 성을 내더라. 약속도 안 했으면서.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부랴부랴 짐을 사서 밖으로 나왔어. 처음엔 로비로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자꾸만 계단을 올라가는 거야. 허락받지 않고 허락받지 않은 곳에 갈 수는 없잖아. 내가 주저하니까 그러는 거야.

“루다, 인생에서 딱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모험을 즐기지 않잖아. 근데 솔깃하더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따라갔어.

한 층 더 올라가서 우리는 비상구 표시가 있는 문을 열고 나갔어.

밖은 고요하고, 고요했어. 어두운 난간에 서 있으니까 간간이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파도 소리래. 바닷물이 밀려오면서 내는 파도 소리. 바다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내가 신기해하니까 백구가 알려 주더라. 아주 어릴 때 바다 근처 마을에 살았대. 그래서 파도 소리를 많이 들었대.

바다는 아주 넓대, 파도라는 게 칠 때 물결이 밀려오는데 거품이 막 일어난대. 그리고 바다 옆에는 모래라는 게 있는데, 모래 위에 서 있으면 발이 푹 들어간다는 거야. 그런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져서 물어봤거든? 근데, 글쎄. ‘어제’에서 본 거고, 바다 근처 마을에 살았지, 바다를 직접 보러 가지는 못했다고 하더라. 정말 엉뚱한 애야.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긴 했어. 우리도 집과 시청, 병원, 몇몇 지정된 장소 외에는 가 볼 수 없었잖아. 아무튼, 그 얘길 듣고 나니까 나도 ‘어제’에서 바다를 본 게 그제야 기억나더라.

센서. 백구와 나는 난간에 좀 더 머물렀어.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덜 어두워지더니, 아주 멀리, 저 건너편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어. 날이 밝아지기 시작해서 하늘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진 하늘 사이에서 기척도 없이 태양이 솟아올랐어. 태양이라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더라. 태양이 뜨니까 보이는 모든 것이 갑자기 달라 보였어. 같은 장소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야 말았어.

그 뒤로는 정신이 없었어. 백구 손에 이끌려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줄을 서고, 신분 확인을 하고, 비행선에 올랐어.      


그리고 나는, 떠났어.  

   

센서, 그저께 내가 잠든 후에 카펫 귀퉁이 잘라서 무릎담요로 만들어 준 거, 카펫 잘랐다고 화내서 미안해. 네 말이 정말 다 맞는 거 같아.

잠을 자다가 나도 모르게 네 이름을 불렀어. 네가 답하지 않더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거야. 깜짝 놀라서 그만 잠에서 깼어. 이토록 캄캄한데 네가 없으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 내 옆엔 항상 네가 있었어. 네가 만들어 준 무릎담요를 배게 위에 펴고 만지니까 꼭 집에 있는 거 같더라. 다시 잠에 들 수 있었어.     

센서, 내일 아침이 되면 메디움에 도착한대.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떠났다는 게 실감 나니까 두려워져. 가서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는 건 이름뿐이야. 이름만으로 그 넓은 메디움에서 정말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파키오는.

너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봐. 그런데 물어볼 수 없었어. 약속했거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어쩌면 넌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패드를 받았어. 생각은 할 수 없는 기기래. 노트용으로 쓰라고 주더라.

그래서 나를 영원히 기억해 줄 너에게 썼어.      

언젠가 내가 사라져도 너는 기억할 테니까.    

 

안녕, 센서.

안녕, 파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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