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설탕 듬뿍 도넛

by 한그루


그렇게 친구를 보내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내가 영국에 온 이유가 뭘까?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긴 하는데,

과연 방향은 맞는 걸까?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순 없으니

식음료부서에서 일하며 중동 항공사 취업을 준비한다?

어쩌면 막연하게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였다.

‘나 정도면 할 수 있겠지’가 아니라

‘여기에 내 남은 생을 걸겠어’ 정도의 확신이 필요했다.


2년 동안 어영부영하다

결국 빈손으로 한국에 쫓기듯 돌아갈 수도 있으니.


언제까지 기물만 닦으며

기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 목록에서 하나씩 지워나가고 순서를 정해야 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중동 항공사 홈페이지를 찾아봤고

가장 가까운 일정으로

바로 며칠 뒤에 Q항공사 승무원 채용오픈데이가

그리스에서 열리는 것을 확인했다.


2017년 5월 7일
Athenaeum Intercontinental Hotel, Athens
오전 9시 (9:00 AM sharp)
Athens, Greece


'진짜 마지막이다. 이번이 아니면 이젠 정말 끝이다.


당장 가려고 하니

역시나 빠듯한 예산이 또 발목을 잡는다.


이 얘기를 들은 마리아는

나에게 부족한 돈 300파운드를 선뜻 빌려주었다.


"Darling, Go and do what you like before it's too late"

“늦기 전에 어서 가!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렇게 나는 급하게 티켓팅을 하고 일주일 휴가를 받아 그리스로 떠났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해서 숙소로 이동했다.

Monastiraki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니

파르테논신전이 보였다.

'참, 내가 하다 하다 그리스까지 왔구나.'

길을 따라 숙소를 찾았고 무사히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있을 면접장을 답사했다.

걸었을 땐 얼마나 걸리는지,

호텔에 들어가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 정도면 괜찮겠군.'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노상에서 파는 설탕이 듬뿍 발린 도넛이 보였다.

꼬르륵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조금이라도 날씬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꾹 참고 다시 숙소로 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퉁퉁 부은 얼굴로

면접에 참여할 순 없으니까.




드디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블랙커피 한잔을 마시고,

어제 답사 한대로 면접장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회사 오리엔테이션부터 들었다.

복지, 근무환경, 모든 게 참 매력적인 회사다.

얼마나 좋을까.

세계를 여행하며 내 커리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게.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왔다.

구겨질까 찢어질까 런던에서부터

애지중지 가져온 이력서를 파일에서 꺼내어

면접관 앞으로 갔다.


"Good morning, Nice to meet you."


이번 단계에서 만약 합격이라면,

면접관은 나에게 다음 인터뷰 스케줄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안내해 줄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냥 탈락인 것이다.


과연 면접관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면접관은 내 이력서를 받고

잠시 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력서 리뷰한 후 오후 6시까지 연락 줄게요."


아….

나는 미소를 보이며 면접장을 나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다음 면접 볼 사람들은 다 정해지고 있는 중인데,

리뷰 후에 연락 준다는 말로,

이렇게 간절한 취업준비생들에게 희망고문을 시키다니,

매력적인 회사고 나발이고,

이런 곳이라면, 나도 노땡큐입니다!'


사실 나는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현재 한국인 승무원들의 숫자가 초과 상태라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까지 채용팀이 온 것은,

그리스 노선에 투입될 직원들을 뽑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쩌면 ‘예외’라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직접 와서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결국 그런 반전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후련했다.

마치 버켓 리스트의 제일 위에 있는 큰 항목 하나에

체크 표시가 된 것처럼.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제 그 노점상에 설탕이 잔뜩 발라진 튀김도넛이 보였다.

이젠 참을 필요가 없지.


"도넛 1개 주시겠어요?"


상점 주인은 물었다.

"바로 먹을 건가요? 포장해 드릴까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먹을 거예요."


계산을 하고 도넛을 받았다.

그리곤 한입 크으으으게 베어 먹었다.

그때 어디선가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와'


어찌나 맛있던지.

공복에 들어간 설탕의 단맛이

모든 신경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리고, 나의 지난 시간들이 스쳐갔다.


국내 대형 항공사 면접을 앞두고

극심한 다이어트를 한 탓에 힘없이 걷다 넘어져서

다리에 피가 철철 흘렀던 날.

다 아물지도 않은 깊은 상처에 파운데이션을 바르며

면접을 보러 갔던 날.


대학교 졸업 반부터

친구들 몰래 국내 항공사를 시작으로.

그리고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한 다음에도,

연차를 내고 몰래 면접을 보러 다녔던 날들.


어쩌면 외항사는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시 도전을 결심했던 날들.


내가 부족했을 때는 기회가 와도 잡지 못했고,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는 기회가 나를 비켜갔다.


마치

온 세상이 이 길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30대. 이젠 좋아하는 것들과도

성숙하게 이별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할 때였다.

그리고 10년이면, 이젠 할 만큼 했다.


불면 날아갈까, 움켜쥐면 부서질까

남몰래 가슴속에 꼭꼭 숨겨온 나의 오랜 꿈.

이제는 보내줄 시간이라는 걸 예감했다.


이렇게 맑은 날씨에

아직 해가 떠있는 이 시간에,

아테네의 한 거리를

살찔 걱정 없이 이렇게 달콤한 도넛을 먹으며

걷고 있는 내가 보였다.


꼭 잡고 있었던 소중한 내 꿈을 내려놓자,

블랙커피의 씁쓸한 아닌

설탕 듬뿍 발린 도넛처럼, 삶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날로서 나의 10년짜리 on & off 도전은

정말로 끝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6일이 남았다.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그리스면 산토리니지!'


나는 급하게 산토리니로 가는 배편을 알아봤고,

내일 아침 새벽 그곳으로 들어가는 페리 시간표를

확인 했다.


티켓을 결제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고 다음 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

나는 캐리어를 끌고 항구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오늘 밤은 어디에서 자야 할지 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그렇게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보지 않고.



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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