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니에서 기쁜 나의 젊은 날

by 한그루


당장 오늘 밤 묵을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산토리니행 배에 몸을 실었다.

에게해 한가운데서, 급하게 잠자리를 검색했다.


일단 2박. 나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아테네를 아침일찍 출발한 페리가

8시간을 달려 드디어 산토리니 섬에 닿았다.

그리스는 미남 천국이라더니,

버스 요금 회수하는 아저씨도 원빈처럼 생겼다.

나도 모르게 자꾸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항구에서 버스를 타고 피라 마을로 이동,

오늘부터 묵을 숙소에 짐을 풀었다.

근처 슈퍼마켓에 음료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맛본 참깨 땅콩 브리틀.

너무 맛있어서 하루에 두 번씩 들르다 보니

어느새 주인아저씨와도 가까워졌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그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테네에서부터 느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참 따뜻하고 친절한 것 같다.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유머러스하고

배려가 넘쳤다.


그림 같은 골목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와인도 마셨다.

신혼여행지라고들 하지만,

이 정도면 혼자라도 충분히 행복했다.


'진짜,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둘째 날, 이아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잘 되던 구글맵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길을 잃었다.


그렇게 나는 끝도 없이 걷게 되었고

어느덧 바다 가까운 레스토랑 앞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뭐라도 좀 마시자.'

꽤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었지만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어!생각하며 과감하게 들어갔다.


"Could I please have a glass of white wine?"

"화이트 와인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Of course, come and have a seat. my lovely"

"물론이죠. 어서 와서 앉으세요"


오후 4시, 점심시간도 저녁시간도 아닌 덕에

식사 주문도 없이 가장 좋은 바다뷰 자리를 얻었다.

직원은 내가 혼자 여행한다는 걸 알고는 사진도 찍어주고,

레스토랑 구석구석도 구경시켜 줬다.


"Thank you so much. Could I please have my bill?"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계산서 주시겠어요?"


그러자 직원이 하는 말에

나는 끝내 눈물이 핑 돌고야 말았다.


"It's on the house, just a little thing from us.

Welcome to Santorini. my lady!"

"이건 작지만 우리가 사는 거예요.

아가씨, 산토리니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그러더니 가게 안쪽에서 가져온 산토리니 여행 책자를 손에 쥐여줬다.

직원은 이곳에 정말 좋은 와이너리가 있다며

와인을 좋아한다면 꼭 한번 가보라고 했다.


가게를 나오자, 거짓말처럼 구글맵이 또 신호를 잡았다.


이아 마을 언덕에서 석양을 기다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그 빛이 바다로 서서히 스미는 것을 함께 바라봤다.


일몰을 보며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가면 언제 또 오겠어. 까짓 거 하루 더 있는 거야.'




나는 즉흥적으로 숙소를 하루 더 예약하고

다음 날, 그 레스토랑 직원이 추천해 준 와이너리를 찾아갔다.

와인을 한 잔 주문하고,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잔잔한 바다 위로 해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나는 다짐했다.

가슴속에 오랜 시간 품어온 나의 꿈도,

친구에게 못났던 내 모습도,

힘들었던 과거들도

전부 이 일몰에 실어 함께 떠나보내기로.

런던으로 돌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일몰에 취해 막차 시간을 놓쳤는지도 몰랐다.

와이너리는 외진 곳에 있었다.

버스를 놓치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벌써 지나갔어야 할 버스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있는 마치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힘껏 손을 흔들었고,


"여기에요!!!"


기사님은 전조등을 반짝여 답해줬다.

얼마나 뛰었던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버스에 올라탔다.


"So sorry!"

"정말 죄송해요."


"Just about to leave, good timing!"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

페리에서 쓸 엽서와 우표를 사고

어김없이 슈퍼마켓에 들렀다.

음료와 참깨땅콩 브리틀을 집으며 아저씨에게 말했다.


"I'm leaving tomorrow. Thank you for everything."

"아저씨, 저 내일 떠나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아저씨가 말했다.

"My lady, Comeback anytime! but not on your own. Good luck!"

"언제든지 오세요. 대신 다음엔 혼자 오지 마세요.

행운을 빌어요."

그리곤 특유의 익살스러운 윙크로 또 날 웃게 했다.


다음 날 새벽, 택시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곳을

나는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다시, 에게해.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


페리를 타고 얼마나 왔을까.

수평선 너머로 빨간 해가 떠올랐다.

매일 뜨는 해지만,

그날의 일출은 다른 듯 보였다.

마치 기쁜 나의 젊은 날을 축복하 듯

찬란하고 아름답게 떠오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그루입니다.


[영국은 처음이라]를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다음 주부터 3주간 한국에 갑니다. 거의 3년 만이라 준비할 게 너무 많네요. 36개월 아이와 14시간 비행이 벌써부터 두렵지만, 남편도 있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아이한테 한국의 넘사벽 키즈카페와 바나나 단지우유를 맛 보여줄 생각을 하니 너무 신나요.

그래서, 그 기간 동안은 연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국에 돌아오는 대로 그리스 이후 런던에서의 시간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도 함께 나눠 보겠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산토리니에서 직접 찍은 것들이에요. 이번 편 글을 쓰다 보니 독자분과도 나누고 싶었어요.


4월에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한그루 올림



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