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아이가 미술을 만나면' 中
글 이소영 에디터 박은아
Anna Ancher, Sewing Fisherman's Wife, 1890
얼마 전 친한 친구 둘과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친구의 엄마는 얼마 전 다리를 다쳤는데, 다친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20년간 운영하시던 식당 일을 계속해 친구를 속상하게 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의 엄마는 평생 일을 하느라 고생해서 이제 좀 쉬어도 되는데 아직도 동네 아줌마들과 철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소일거리로 한단다. 친구는 엄마가 편하게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늘 괜찮다고만 한다며, 왜 그렇게 쉬는 것을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엄마가 얼마나 강하고 힘들게 살아왔는가를 경쟁하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하다 우리는 갑자기, 슬퍼졌다. 도대체 우리의 엄마들은 언제부터 이토록 강했던 것일까? 엄마도 나처럼 평범한 30대 여성일 때가 있었을 텐데, 엄마도 나처럼 어떤 날은 아무것도 안하고 잠만 늘어지게 자고 싶고, 어떤 날엔 술도 펑펑 마시고 싶었을 텐데…. 그 많은 책임감을 어떻게 어깨에 짊어지고 우리를 다 키워낸 것일까.
친구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없는 곳에서는 ‘우리 엄마가 최고야!’라고 해놓고는 막상 밥은 잘 챙겨 먹었냐는 엄마의 말을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또 후회했다. ‘엄마에게 상냥하기’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내 평생의 숙원 사업이다. 세상 모든 딸들은 왜 이렇게 엄마에게 약하면서도 강할까. 우리는 가장 편한 존재에게 가장 약해지고, 가장 강해진다. 나이가 드니 이제 ‘엄마’ 소리만 나와도 금세 마음이 뭉클해지고 바로 반성 모드로 변환된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여자가 아닌 엄마로, 주부로 살았을 엄마의 과거 시간들이 더 생경하게 가늠이 돼서 일지도 모르겠다.
핀란드에는 ‘엄마가 자식에게 주고 싶은 것만 파는 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엄마에게 주고 싶은 것만 파는 시장’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화가 안나 앙케의 그림을 그 시장에 내놓고 싶다. 그녀의 그림들은 ‘딸이 엄마에게 주고 싶은 그림’이다.
덴마크 출신의 안나 앙케(Anna Ancher, 1859~1931)는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여성 화가다. 남성 화가가 주를 이루었던 유럽의 화단에서 여성은 늘 아름답게 꾸며진 모델이거나 대상화된 존재였던 것에 반해, 여성 화가의 그림 속 여성들은 일상 속 주체로 표현될 때가 많았다. 안나 앙케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일상을 쫓아다니며 파파라치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면 이런 장면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안나 앙케는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최북단에 있는 스카겐에서 여인숙과 잡화점을 운영하는 부모의 다섯 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스카겐은 1870년대 말과 19세기 사이 젊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는 1870년대 이곳을 방문한 화가였던 크리스티안 크로그, 칼 마드센, 비고 요한센, 미카엘 앙케에게 미술교육을 받았고, 1875년에는 여성에게도 미술교육 기회를 준 코펜하겐의 빌헬름 킨학교에 다녔다. 당시 여성교육은 보편적이 아니었고 덴마크 왕립 예술 아카데미는 여성에게는 장학금도 주지 않았지만, 안나의 어머니는 딸의 예술 활동을 지지했고 후에 안나 앙케와 결혼한 미카엘 앙케도 안나 앙케가 화가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지해줬다.
1870년대에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풍이 유럽에 서서히 알려졌고, 야외에서 실제 자연의 풍경을 포착해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안나 앙케가 그린 대상은 대부분 가정과 여성, 어린이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동시에 한 남자의 부인으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가사를 담당해야 했던 그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안나 앙케가 포착한 일상 속 여성들의 모습은 잊고 있던 엄마의 일상이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명화는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들을 새삼 떠올리게 해준다. 살기에 바빠서 잊고 지냈던 엄마의 일상,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깜빡 하고 놓친 엄마의 존재를 과거의 안나 앙케가 그려놓은 그림으로 다시 되새겨보자. 조만간 엄마를 만나면, 엄마의 하루하루도 안나 앙케가 남긴 명화만큼 멋졌노라고, 엄마의 삶이 이 그림보다 아름다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소영
10년 넘게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는 교육자이자 자신이 어른이 됐다고 느끼면서부터 어른들에게도 미술 강의를 시작한 강사. 미술교육원 ‘소통하는 그림연구소-빅피쉬art’ 대표이자 <그림은 위로다> <출근길 명화 한 점> <엄마로 태어나는 시간> 등을 펴낸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