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아이가 미술을 만나면' 中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서툰 아이들에게 그림은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언어다. 그러니 미술은 부모가 아이와 대화하고 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17년간 미술을 가르치며 쌓인 노하우로 여덟 살, 세 살 두 아들에게 직접 미술을 가르치고 있는 박윤지 아동미술전문가는 블로그와 책을 통해 미술에 서툰 부모들과 교감하며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글 박헤나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유재철 사진 제공 박윤지
내 아이와 미술 놀이
치약 상자를 재활용해 만든 로봇, 우드록으로 만든 곤충, 택배 상자에 색종이 수염을 붙여 만든 호랑이 가면 등 아이의 미술 작품으로 가득한 유찬이네 집. 여덟 살 유찬이에게는 버려지는 종이 상자며, 요구르트 병, 스티로폼 포장재가 모두 다 미술 재료다. 칼로 우드록을 자르고 글루건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미술 놀이를 한다. 머릿속에 상상한 것들을 주변 재료와 도구를 이용해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미술로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는데 익숙한 것은, 두 돌 무렵부터 엄마와 미술 놀이를 해 왔던 탓이다.
“미술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유찬이를 낳은 뒤 아이와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두 돌 무렵,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싶은데 처음에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죠. 고민 끝에 엄마인 저와 함께 미술 놀이를 하기 시작했어요. 물감을 짜서 데칼코마니를 해보기도 하고, 스티로폼에 그림을 새겨 판화로 찍어 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재료의 성질을 활용해 미술과 친해질 수 있었어요. 다섯 살이 돼 동생이 태어난 뒤부터는 혼자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가위질, 풀질도 늘었고 칼이며 글루건도 익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죠.”
물론 칼에 손을 베어 피가 난 적도 있고, 뜨거운 글루건에 데어 가벼운 화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아이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 혼자 해내는 요령을 익혔고, 다치지 않고 도구를 다루는 법을 터득했으니까.
“우연히 나사 하나를 주워서는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우드록으로 만든 공룡에 끼워 다리를 움직이게 하지 뭐예요. 엄마의 지시와 참견이 줄어든 만큼 아이의 창의성이 자란 셈이에요. 혼자 실패하면서 터득한 창의성이죠.”
유찬이는 어린이집에 가면 블록 대신 가방 속에 넣어 둔 종이 상자를 가지고 놀았단다. 뭔가 쓸모 있을 것 같으면 “엄마, 버리지 마. 저건 내가 쓸 거야”라며 주변 재료를 활용해 새로운 창작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저는 장난감을 잘 안 사줘요. 집에 있는 장난감은 거의 선물 받은 것이죠. 대신 5분, 10분이라도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재활용품으로 미술 작품을 만들며 함께 놀아줘요. 아이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엄마와 함께 미술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걸 훨씬 좋아하고요. 미술은 아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듣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파악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참 좋은 수단이에요.”
미술과 함께
성장한 아이와 엄마
집에서 아이들과 미술 놀이를 하며 성장한 것은 유찬이와 찬민이만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윤지 씨를 아동미술전문가로 성장시켰다. 사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중?고등학생들을 개인 지도한 것을 시작으로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아동 미술교육에 대한 책을 내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난 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미술학원을 운영할 때 모아 놓은 자료들을 정리해 오픈하기 시작했죠.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미술 선생님들은 물론 ‘엄마표 미술’에 관심 있는 엄마들까지 블로그에 와서 정보를 얻어 갔고, 오프라인에서 만나 창의 미술교육과 ‘엄마표 미술’ 교육까지 하게 된 거예요. <아이와 소통하며 만드는 미술> <엄마도 미술 선생님> 등의 책을 내기도 했고요.”
그는 미술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할 때가 많았다. ‘도대체 저 작은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으로 인해 색채 심리나 미술 치료 등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색채 심리나 미술 치료를 공부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았고, 인간의 마음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심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은 아이의 심리를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도서관과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어요.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가 평소에는 밝은색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날 온통 검은색으로만 색칠을 하더라고요. 알아보니 아빠가 수술을 받아 입원 중이었어요. 우울한 마음을 검은색으로 표현한 거죠.”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아이들의 창의성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창의교육을 공부하고 있다. 미술을 통한 창의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교육하고 있다.
“아이가 달라지려면 부모와 교사가 달라져야 해요. 부모나 교사는 그들이 배운 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만, 지금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많이 달라요. 한 번은 놀이터에서 엄마들과 얘기를 하는데 한 엄마가 ‘미술은 공식을 알아야 하잖아요’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제가 ‘미술에 공식이 있어요?’하고 되물으니 ‘그림자는 어떻게, 비례는 어떻게 그리는지 배워야 그리잖아요’하더라고요. 유아기에는 직접 경험하고 그려보는 게 중요해요. 그림자에 대해 알려면 하얀 종이를 깔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림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고 그림자를 직접 그려보면 돼요.”
윤지 씨는 부모가 아이와 함께 경험하고, 그 경험한 바를 가지고 내 아이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맞춤형 미술 교재를 만들도록 돕고 싶어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재능기부 강연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부모표 미술’ 강의인 셈이다.
부모나 교사는 그들이 배운 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만, 지금의 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많이 달라요. 아이들은 이론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그려보는 게 중요해요.
미술, 어렵다는
생각부터 버리기
미술교육을 하면서 부모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아이가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미술이 익숙하지 않은 부모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도 해볼까?’하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짜야 한다는 부담감에 지레 겁을 먹기 일쑤다. 엄마·아빠표 미술,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사귄 친구와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을 같이 했었어요. 그런데 첫 미술 수업하는 날, 평소 씩씩하던 아이가 의기소침해 있지 뭐예요. 그림 그리는 내내 ‘못 그려요’ ‘잘 못하겠어요’ ‘어려워요’라며 선뜻 손을 대지 못하더라고요. 천천히 그려보게 도와주었고, 아이는 가까스로 호랑이를 그려냈어요. 시도해보니 된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뒤이어 사자도 그렸죠. 그림은 시도가 중요해요. 어렵다면 먼저 선 긋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부모가 전에 미술을 배웠건, 배우지 않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부모도 옆에서 스케치북을 펴놓고 같이 그리면 된다. 예컨대 윤지 씨는 여덟 살이 된 첫째 아이가 장수풍뎅이를 그리면, 옆에서 스케치북을 펴놓고 함께 장수풍뎅이를 그린다. 이때 주의할 점은 아이보다 너무 잘 그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기를 쓰고 아이에게 실력 자랑을 하려는 부모의 욕심은 잠시 접어두라는 얘기다.
“간혹 엄마, 아빠의 그림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아이가 위축되는 경우가 있어요. 한 번은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참여하는 미술교육을 하는데, 한 엄마가 ‘우리 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싫어해요’라며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엄마에게 그림을 그려보게 했더니, 너무 잘 그린 거예요. ‘어머니! 아이 앞에서도 이렇게 그리셨어요?’하고 물으니 그렇대요. 엄마의 뛰어난 그림 실력이 아이의 기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던 거죠. 엄마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아이 앞에서는 실력을 자랑하지 마세요. 아이보다 조금 못하게 그려야 해요. 그래야 아이가 시도해볼 용기를 낼 수 있어요.”
그림을 그리다가 아이가 “엄마, 도와줘요!”하며 도움을 청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고민하지 말고 아이를 도와주면 된다. 그 이면에는 ‘엄마, 우리 함께해요!’ ‘아빠, 나 좀 봐주세요’라는 아이의 속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도와주는 거 아냐. 혼자 힘으로 그려야지”하거나 “아빠는 못해”하며 아이의 요청을 거절하고 등을 돌리기 일쑤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우리 아빠는 못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이의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땐 도와줘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때도 전적으로 모든 과정을 부모가 해주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에게 역할을 부여하면서 도와야 한다. 예컨대 아이가 상어를 그리려는데 시도하기 힘들어 하면 “상어 이빨은 어떻게 생겼더라?” “꼬리는 어떻게 생겼지?”하면서 발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잘 모르겠는데, 네가 한 번 그려볼래?”하면, 아이는 “그것도 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형태를 그려 간다.
“부모도 모를 때는 같이 찾아보세요. 저는 아이가 ‘엄마, 장수풍뎅이 옆모습은 어떻게 생겼죠?”하고 물으면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 함께 찾아볼까? 장수풍뎅이 책 가져다줄래?’하고 아이와 함께 모르는 것을 풀어나가요. ‘장수풍뎅이 뿔은 그리기 어렵다. 네가 그려볼래?’하고 아이에게 그릴 기회를 주고 아이가 못 그렸더라도 ‘진짜 장수풍뎅이 같은데!’하며 환호해주는 거예요. 자신감 주고 유도하고, 호응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부모는 아이가 무얼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향과 기질도 잘 파악하고 있기에 부모는 훌륭한 미술 선생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가르치려다 보면 자칫 욕심도 커지기 마련이다.
“결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미완성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부모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손을 대고 몇 가지라도 더 그리게 돼요.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것과 다르니 ‘난 이거 싫어!’하며 울기도 하죠. 아이의 실력을 존중해주세요. 내 아이가 더 잘했으면 하는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난 못하니까 엄마가 다 해줘야 해’라는 의존적 성향을 은연중에 품게 되고요. 부모의 욕심이 ‘엄마·아빠표 미술’을 실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해요. 답답하더라도 혼자서 작업하도록 기다려주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고정관념을 깨고 다르게 접근해 보는 활동도 중요하다. 윤지 씨는 유찬이와 함께 포스터컬러를 섞어서 새로운 색을 만들었다. 물감을 보면 섞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잘 파악한 것. 두 가지씩 색을 섞어서 ‘똥색’ ‘진한나뭇잎색’ ‘신레몬색’ 등 이름을 붙였다. 색을 직접 만들고 이름 붙이면서 색에 대한 생각을 넓힐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얀 백지에 그림 그리기를 주저하는 아이라면, 사진을 출력해서 그 위에 그림을 덧그려 보는 것도 좋은 시도라고.
“아빠와 캠핑 가서 찍은 사마귀 사진을 출력해줬더니 그 위에 여러 곤충들을 그리더라고요. 자연 풍경이 시원한 여백을 만들어주는 사진도 좋아요. 아이가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아이의 기질을 알면
미술도 쉽다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부모다. 기질과 성향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아이들도 제각각이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처럼 활동적일 수도 있고, 남자아이가 소심하고 정적인 활동을 좋아할 수도 있다.
“저는 미술 활동을 할 때 성별보다는 기질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활동적인 아이들은 퍼포먼스 미술을 좋아하지만, 세심하고 소극적인 아이들은 몸에 뭐가 묻는 걸 싫어하기도 하죠.”
큰 종이를 줘도 그림을 작게 그리는 소극적인 아이들이 많다. 이 아이들은 자신감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안감을 많이 느낀다. 이런 아이에게는 붓과 화선지를 쥐어주고 선이 진한 먹으로 크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게 좋단다. 바닥에 큰 종이를 깔고 서서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그려보게 하는 게 좋다.
짜증을 많이 내는 아이라면 미술 활동을 하기 전에 대화하며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게 좋다. 풀리지 않은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여서 짜증과 신경질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엄마, 아빠, 선생님의 뒷모습을 그리거나 말풍선을 그리기도 한다. 누군가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싸움이 잦은 아이들도 있다. 마음속에 분노가 쌓여 전투적인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색깔도 붉은색 계통이나 무채색을 많이 사용한다.
“상어에게 잡혀 피가 나는 장면, 도시에서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 등 죽는 장면을 많이 그리는 아이가 있었어요. 불안감이 크다는 걸 알고 아이에 대해 알아보니, 무섭고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누가 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이가 우연의 효과를 주는 마블링 물감 그림을 보더니 ‘코끼리가 보여요’라고 하더라고요. 코끼리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최고’라고 칭찬해주었더니 자신감을 회복하며, 선한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집중하지 못하고 싫증을 빨리 내는 산만한 아이라면 먼저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주의력 결핍 장애인지 아동기의 보편적인 특징인지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만함은 애착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불안감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또한 부모나 선생님의 관심을 유도하고 싶어 산만한 행동을 하기도 하죠. 마블링 물감이 주는 우연의 효과를 통해 재미와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티셔츠 염색, 버리는 장난감을 재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활동 등을 하는 것이 좋아요.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아이의 관심사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양한 경험은 아이의 예술 활동에 커다란
자원이 된다. 그리고 예술 활동은 다시
아이가 살아가는 데 있어 든든한 삶의 자원이 된다.
자원이 풍족한 아이
“아이를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뿌리는 과거, 기둥은 현재, 나뭇잎과 열매는 미래라 할 수 있어요. 부모는 햇빛과 바람, 때론 눈과 비가 되죠. 아이들은 뿌리로 행복한 경험과 추억, 부모의 인정과 믿음, 지지라는 양분을 흡수해 성장해 나가요.”
하얀 도화지에 그릴 것이 많은 아이가 있고, 그릴 것이 없는 아이가 있다. 그림을 통한 표현력은 떨어지지만 이야기가 많은 아이가 있다. 그림책을 많이 읽는 것도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행, 전시회 관람 등도 아이에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준다.
미술 활동은 단지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하는 것만이 아니다. 경험 보따리를 키우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미술 활동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에 자주 간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연계 프로그램에 참여해 카메라를 만들기도 하고, 폐품을 이용해 CD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아이는 무심코 전시를 보고 참여하는 것 같지만 사진 찍듯 하나하나를 기억한다.
“한 번은 아이와 모딜리아니 전시를 보러 갔어요. 제가 모딜리아니를 너무 좋아하는데, 아이는 재미 없어 하더라고요. ‘엄마, 캄캄해. 재미없어’하더니 며칠 지나서 버스 정류장에 걸린 모딜리아니전 광고를 보더니 ‘엄마! 모딜리아니다!’하더라고요. 린다 매카트니 전에 다녀와서는 애니메이션 <미니언즈>에서 비틀스의 앨범 재킷이 등장하는 걸 보고 ‘엄마, 전시장에서 봤잖아’하고 기억해 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과 전시회를 함께 가는 것도 추천해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흥미 있어 하는 애니메이션 전시회부터 시작해보세요.”
전시회라고 해서 미술 전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유찬이의 최대 관심사인 곤충들이 가득한 생태관, 아이들이라면 누구든 좋아하는 자동차 박물관, 공룡을 만날 수 있는 자연사 박물관, 우주 박물관 등도 해당된다. 다양한 경험은 아이의 예술 활동에 커다란 자원이 된다. 그리고 예술 활동은 다시 아이가 살아가는 데 있어 든든한 삶의 자원이 된다.
윤지 씨는 아이들이 지금껏 그리고 만든 수많은 결과물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서른 살이 된 한 남자가 직장 생활도 힘들고 사는 게 너무 고달파 우울감에 빠져 있었대요. 그때 우연히 책꽂이에 꽂혀 있던 오래된 일기장을 펴 들었는데, 열세 살 때 쓴 것이었어요. 어느 페이지인가에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해요. ‘서른 살의 ○○○야, 힘내!’ 흔적을 남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소중한 추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절체절명의 순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의 그림은 되도록 버리지 않고 모일 때마다 책으로 만들고, 미술 활동 중에 만든 작품들은 사진으로 찍고 출력해서 보관해 둬요.”
두 돌 무렵부터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첫째가 여덟 살 초등학생이 됐다. 이제 세 살이 된 둘째는 어린이집에 가기 전 늘 붓을 들고 한바탕 그림을 그린다. 엄마도 아이도 그림으로 소통하며 참 많이 자랐다. 엄마·아빠표 미술은 어쩌면 교육이 아닌, 아이들의 놀이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그릇을 키우는 놀이 말이다. 밥을 먹듯 숨을 쉬듯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쑥 자란 키만큼이나 창의력도, 마음의 크기도 자라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