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아이가 미술을 만나면' 中
미술은 아이 내면의 예술성을 키워주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인지 능력과 대·소근육 발달, 공간 개념 등 여러 영역의 발달을 유추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해석 불가능의 첫 그림을 그리는 순간부터 그럴듯한 풍경화를 그리기까지, 아이의 미술 표현 능력의 단계를 살펴봤다.
에디터 박은아 참고 도서 양연숙·장혜자 외 <영유아 미술교육>, 이현아 <유아 미술교육>, 차주희 <현대 유아 미술 교육의 이론과 실제>, 김선현 <엄마는 아이의 마음주치의>
STEP 1. 무의미한 낙서는 자기표현의 시작(0~만 2세)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고 듣고 느끼는 다양한 경험을 흡수하며 예술적 바탕을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다양한 일상의 경험과 접촉을 통해 아이가 예술성을 축적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 천장에 다는 모빌과 벽에 붙이는 그림, 놀잇감, 자연물 등 다양한 색과 모양, 질감을 지닌 모든 사물이 훌륭한 미술 재료다. 아이가 스스로 앉고 손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면 비비기, 문지르기, 찢기, 붙이기 등 오감을 자극하고 소근육 조작 능력을 함께 길러줄 수 있는 미술 활동을 하는 것도 좋다.
갓 태어난 아이는 흑백의 색만 인지하다가 생후 2~3개월이 되면 색채에 대한 지각 반응이 나타나며 점차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아이들은 밝은 원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생후 6개월~만 1세 전후에는 같은 색끼리 짝을 짓고 삼각형, 사각형 등의 도형을 구분할 정도로 색·형태 지각 능력이 발달한다. 소근육이 어느 정도 발달한 이 시기의 아이들은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 감각 없이 그리는 그림, 일명 ‘난화’를 시작한다. 이때 아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목적보다는 낙서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색에 대한 선호도 역시 아직 없어 한 번 선택한 색상으로 끼적거리기를 계속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아이의 자기표현이 시작됐다는 의미이므로, 무의미해 보이는 낙서 그림에도 격려와 지지를 해주는 것이 좋다.
STEP 2. 도형과 패턴을 그려요(만 2~4세)
인지 능력이 보다 발달한 아이는 이제 자기 손의 움직임과 종이에 나타난 결과물 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무질서하던 낙서 단계를 거쳐 일정한 선이나 패턴을 그리기 시작하고, 어설프지만 삼각형과 사각형, 동그라미 등의 도형을 그리기도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기본 도형 2~3개를 합친 집합 형태의 도형을 그리기도 하고, 점차 다양하고 복잡한 도형도 그릴 수 있게 된다. 만 3세경이 되면 자신의 낙서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대상을 그리겠다는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린 후 결과물을 보고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대상을 뭉뚱그려 그리거나 특정 부분만 표현한 후 그 대상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는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지각 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인데, 잘못된 사실을 지적하거나 그림을 고쳐주기보다는 아이의 의견과 작품을 격려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이 시기 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지며 세상과 직접 접촉하려는 욕구가 강하므로, 다양한 사물과 환경을 활용해 아이가 적극적이고 반복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 찰흙이나 클레이를 굴리고 떼어내는 놀이, 종이를 접고 포개는 놀이 등 간단한 조형 활동도 가능하다. 유아용 가위로 종이를 오리는 조형 활동을 통해 소근육 조절 능력과 눈과 손의 협응력을 키워주는 것도 좋다.
STEP 3. 의식적인 표현의 시작(만 3~5세)
인지 능력과 모방 능력, 소근육 조작 능력 등 여러 영역의 발달이 어우러져 드디어 의식적인 표현을 시작하는 시기다. 아이는 이제 자신과 주변을 의식적으로 표현할 줄 알고, 부모가 유추할 수 있는 형태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표현력도 높아진다. 이 시기 아이들의 첫 상징적 표현은 대개 사람으로, 동그란 얼굴 아래에 선으로 발만 그린 일명 ‘두족화’로 출발해 점점 다리, 몸통, 팔 등도 표현하는 세분화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나아가 집, 꽃, 사람, 나무 등 익숙하게 보는 사물을 위주로 한 다양한 그림도 그린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좋아하는 대상만 즐겨 그리고 감정에 따라 색을 선택해 칠하기도 해, 그림을 통해 아이 심리를 읽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정면의 법칙(모든 대상을 정면으로 그리는 기법), 물활론적 사고(모든 사물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열거식 표현(대상을 일렬로 나열) 등 유아기 그림의 보편적인 특징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는 아이의 발달 과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일일이 고쳐주거나 지적을 해서 아이의 표현 욕구를 꺾지 않도록 주의하자. 한편 표현력의 성장과 함께 창작 욕구도 폭발하는 시기로 오리기, 모자이크, 핑거페인팅, 판화 그림 등 색다른 표현 기법을 시도해보면 좋다. 협응력의 발달로 보다 섬세한 가위질과 접기 등을 활용한 공예 활동도 가능하며, 가위로 표시된 선을 따라 오려 모양을 만들 수도 있다.
STEP 4. 객관적이고 정확한 표현의 발달(만 5~7세)
표현 방법이 풍부해지며 객관적이고 정확한 표현과 색채 사용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이 시기 아이들은 인물을 중심으로 주변 사물을 그리는 경향이 강하며,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이고 개념적인 표현도 할 줄 알게 된다. 한편 세계에는 일정한 공간 질서가 있다는 공간 개념을 깨달으면서, 그림에 선을 그어 땅과 하늘을 구별하는 등의 기저선을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의식하지 못하므로 한 그림 안에 낮과 밤을 동시에 그리는 등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사물과 공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그리는 투시적 기법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아이의 미술적 표현력이 높아질수록 개인차가 커지므로, 아이의 발달 상태와 개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지도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는 또래와 교육기관의 영향으로 자칫 정형화되고 고정화된 미적 기준이 자리 잡기 쉽다. 하지만 미술에는 한 가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이가 자신의 개성과 창의성을 살려 표현하는 것을 지지하고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통해 유연성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편 이 시기의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므로, 여러 아이들과의 협동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미술 활동을 시도해봐도 좋다.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미술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 성취감과 사회성을 길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