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아이와 꿈' 中
특별한 학교가 있다. 교실은 집, 교사는 엄마다. 성격도, 좋아하는 것도 제각기 다른 세 아이를 제주의 너른 품 안에서 키우며 삶의 선택권을 아이들에게 주는 부부의 단단한 걸음. 그 옆엔 꿈을 향해 느리지만 자기 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있다.
글 박헤나 에디터 박은아 사진 제공 양성일(비원후 아빠)
집, 배움터가 되다
눈을 뜨면 창밖으로 돌담, 귤나무가 보이고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한라산과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제주도의 어느 동네. 아이들이 모두 학교 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이른 아침, 열두 살 신비와 열 살 시원이, 일곱 살 시후네 집은 여느 집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세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양치와 아침 식사를 하고, 성경을 읽고 쓴 뒤 그 다음부터는 자유 시간을 갖는다. 피아노를 치고 싶으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붓을 손에 쥔다. 축구를 하거나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거들기도 한다.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굽거나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신나게 놀이하며 하루를 보내는 여기는 ‘비원후(신비?시원?시후) 홈스쿨’. 세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엄마 장윤희다.
“5년 전 큰딸 신비의 초등학교 취학통지서를 받고, 저희 부부는 고민에 빠졌어요. ‘대학 입시라는 유일무이한 목표, 비교와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교육 환경에 아이를 내몰아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세 아이는 각자 성격도 다르고 잘하고 못하는 부분도 다른데, 그런 기질대로 자랄 수 있길 바랐어요. 이 아이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와 아빠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홈스쿨링을 통해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어요.”
엄마, 아빠의 결단에 큰딸 신비도 흔쾌히 동의했고, 그 무렵 여섯 살이던 시원이도 유치원을 그만두고 홈스쿨링에 합류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우려도 있었다. ‘학교=사회성’이라는 공식에서 나온 우려가 가장 컸지만, 윤희 씨와 성일 씨는 사회성은 부모와의 안정된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믿었다. 또 막상 홈스쿨링을 시작해보니 같은 나이대 친구와 사귀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만 벗어나면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지만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부부의 평소 성향대로라면 홈스쿨링 시작 전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어야 하는데, 첫아이의 취학통지서를 받고 급히 결정을 하면서 제대로 준비할 틈이 없었던 것. 홈스쿨링의 방향과 방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시작하다 보니,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픈 욕심에 무리한 시간표를 짜서 영어, 국어, 중국어, 한자를 무작정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두 달쯤의 시간을 보낸 후 깨달았다. 왜 홈스쿨링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생각보다, 잘 가르쳐야 한다는 욕심과 조급함이 앞섰다는 걸.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학교에 보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고, 부부는 이내 모든 욕심을 버렸다. 그때 놀이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스스로 자라는 아이들
“초심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무얼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일단 실컷 놀게 해주기로 마음먹었어요. 놀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떠올라요. 놀다 지쳐서 앉아 있으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뇌가 활발하게 돌아가거든요. 배가 부르면 아이들은 에너지가 충전되고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노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실컷 놀고 나면 에너지가 생겨서 책도 보고, 피아노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만들기도 하더라고요. 놀면서 생각한 것을 그림과 음악으로 표현하고, 관련 책을 빌려 봐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에게 노는 것만큼 중요한 수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수업시간표를 없애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아이들은 심심해하며 집 안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더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기 시작했다. 친구가 가져왔던 보드 게임을 종이로 만드는가 하면, A4 용지로 2층 집을 만들고, 종이 인형으로 축구 선수를 만들었다. 심심하면 무얼 할까 궁리해 스스로 할 일을 찾고, 몇 시간씩 몰두해 무언가를 만들다보니 아이들은 하루가 늘 부족하다.
많은 부모가 홈스쿨링이라고 하면 엄마나 아빠가 온종일 아이들과 무언가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윤희 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엄마가 방 안에서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한 지붕 안에 있으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긴다.
윤희 씨가 ‘꿈 다락 토요문화학교(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에서 무용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함께한 시간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란 책을 낸 뒤 특강을 위해 집을 비울 때가 많아지면서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엄마가 있든 없든 아이들은 자기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신비는 영어와 한자, 수학, 과학과 같은 과목을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공부한 뒤 피아노를 친다. 도서관에 가거나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하기도 한다. 시원이는 수학과 책 읽기, 한자, 독서록 쓰기 등 오전 수업을 마치면 신나게 축구공을 찬다. 시후 역시 형과 누나를 따라 공부를 한 뒤 오후엔 뛰어논다. 이렇게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노는 생활 습관을 터득하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루하루 신나게, 재미있게.
그래, 자연처럼 자라면 돼
홈스쿨링을 하다 보니 거주의 자유가 생겼다. 빚 없이 살자는 마음으로 지방으로의 이사를 결정했고, 가족은 제주도에 새로운 터전을 꾸렸다. 무작정 연고도 없는 제주로 이사한 지 어느덧 3년. 부부의 삶도, 아이들의 삶도 달라졌다. 첫해는 사진작가인 남편 성일 씨가 일을 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네 식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3년이 지난 지금, 성일 씨의 일도 어느덧 자리를 잡았고 가족은 서울에서보다 더 분주한 일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은 자연 덕분이다.
머리가 복잡했다가도 고개를 들면 눈에 들어오는 제주의 돌담, 귤나무, 한라산이 여유를 선사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을 친구 삼아 자라면서 겸손함과 부지런함,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위대함, 감사, 기다림을 배운다.
“느지리오름에 갔을 때 신비가 이런 말을 했어요. ‘엄마, 꽃과 나무는 매일 자라지요. 매일 자라는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요.’ 얼마나 자랐는지 눈으로 보아 알 수는 없을지라도, 매일 자라고 있다는 걸 아이도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말해줬어요. 우리도 자연처럼 그렇게만 자라면 된다고, 욕심 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만 자라면 된다고.”
무엇보다 큰 수확은 먼 미래의 성공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기다려주는 게 부모의 몫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집 앞마당에 올여름 옮겨 심은 귤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귤나무는 한 번 옮겨 심으면 3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우리 집 귤나무는 언제 열매가 열리나’하며 기다리더라고요. 하지만 귤이 아닌 새싹을 보려고 마음먹으면, 매년 봄마다 새싹을 볼 수 있어요. 아이를 보는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조금만 여유롭게 바라봐주면 어제 못한 걸 오늘 한 것만으로도 대견하죠. 홈스쿨링을 시작하고 제주도로 내려온 뒤, 아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리라는 얘기를 자주 해요. 지금 행복하고 현재를 누릴 줄 아는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러면 그 삶은 부와 관계없이 성공한 삶이죠.”
조금 덜 벌고, 남들이 덜 알아줘도 상관없다.
비교와 경쟁을 피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다.
장윤희 <함께한 시간만큼 자라는 아이들> 중에서
따로 또 함께, 꿈꾸는 가족
“신비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시원이의 그림 실력이 늘었더라고요. 시원이가 우쿨렐레를 치는 걸 보면서 음악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비가 피아노를 치는 걸 보니 음악성이 있고요. 시원이가 축구를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축구 코치님이 아이들을 보더니 시후가 축구에 재능이 많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윤희 씨는 비원후를 키우며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또 함부로 부모의 눈높이로 아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주지는 못할망정 흥미를 떨어뜨리지는 말자는 다짐도 했다. 그런 부모의 교육철학 덕에 세 아이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그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시원이가 독일과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니 신비도 덩달아 스페인어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하루에 5시간씩 몰입해 공부를 하더라고요. 저희 세대는 대부분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꿈을 찾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선택하고 신나게 몰두하는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날 정도로 부러울 때가 있어요.”
성격도 재능도 다른 세 아이는 꿈도 제각각이다. 감성이 풍부한 신비는 요리사를 꿈꾸고, 한 가지에 몰두하는 성격인 시원이는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한다. 막내인 시후는 꿈이 매일 바뀐다. 저마다 꿈도 다르고 그 꿈이 바뀌기도 하지만, 세 아이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미래의 직업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요리를 좋아해 요리사를 꿈꾸는 신비가 어느 날 지금보다 어렸을 적 기억 한 토막을 꺼낸 적이 있다.
“엄마, 유치원 다닐 때는 선생님이 꿈을 정해줬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의사, 간호사, 선생님, 대통령, 과학자, 음악가 등 몇 가지 꿈을 소개한 뒤 “우리 친구들은 뭐가 되고 싶어요?”라며 제시한 꿈 중 한 가지를 정해 발표하게 한 것이다. 신비는 뭘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돼 급하게 ‘간호사’를 택했다고 했다. 이제 신비는 어른들이 제시한 선택지가 아니라, 자유롭게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를 토대로 신중하게 꿈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꿈은 가족의 식사 시간에 가장 주된 이야깃거리기도 하다. 한번은 밥을 먹다가 시원이가 리프팅을 오백 번이나 했다며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이 정도 노력은 필요하죠”라고 말하니, 신비는 “축구 선수는 나이 들어서는 못해”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원이는 은퇴한 후에는 축구 해설을 할 거라고 얘기했다. 축구 선수 자서전을 읽으며 선수 수명이 짧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먼 미래인데도 당장 할 것처럼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독일과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았다. 그게 불씨가 되어 가족은 “그럼 유럽 여행을 가자!”며 뜻을 모았고, 올겨울 50~60일 예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난다. 꿈에 관한 이야기가 상상도 못한 일로 이어진 셈이다.
홈스쿨링을 시작한 지 5년. 부부는 날마다 생각한다. 홈스쿨링하길 잘했다고. 앞으로도 폭넓은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꿈을 발견하고 놀며 배우는 기쁨을 누리도록 지지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의 행복을 누리며, 느리지만 자기 걸음을 걸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