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180 '안녕, 자존감' 中
글 서효인 에디터 한순호
아가야. 오늘도 엄마, 아빠는 네가 너여서 행복해. 네가 너여서 좋아. 너는 다른 누가 되지 않아도 돼. 그냥 너이기만 하면 돼. 그저 나 자신이기를 주저 하지 않는 삶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단다. 사람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고, 지금의 나에게 부족한 것에 골똘해하는 버릇이 있지. 버릇이란 것은 아주 멀리에 있지 않아. 버릇은 공기와 같아. 예컨대 이런 것이지. 여자애가 왜 그렇게 조신하지 못하니. 너는 왜 남자답지 못하게 인형을 좋아하니. 이 말들이 이상하니?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 씩씩한 파랑과 예쁜 핑크, 영웅 번개맨과 그 옆의 번개걸…. 이런 것들이 이상하니? 이미 이것들은 이상하지 않게 되었단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그것들은 이상한 게 맞아. 매캐한 공기 속에 평생을 산 사람은 그 공기의 매캐함을 알 수가 없지. 우리의 감각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이상한 공기에 오염되어 있어. 어때, 코가 간지럽지 않니? 눈이 맵지 않아?
아가야, 세상에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가 있단다. 흔히 세상 반이 여자고, 나머지 반이 남자라고 해. 그런데 그 말이 완전히 맞는 건 아냐. 더 크면 알게 되겠지만 여자와 남자 그사이 어디쯤에 속한 사람들도 있단다. 그것은 네가 좋아하는 동물 친구들의 이름이나 공룡 들의 학명 같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단다. 오늘은 우선 여자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꾸나. 여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가야, 너는 딸로 태어났단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지. 어린이집 친구 중에는 여자아이도 있고 남자아이도 있어. 성별과 상관없이 너희들은 함께 지내고, 특별활동을 하고, 야외 놀이도 해. 한 번은 소풍을 나온 어린이집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단다. 성별에 따라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단복을 맞춰 입힌 걸 보았어. 세상에 색깔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혹은 남자는 파란색 피가 흐르고, 여자는 분홍색 피를 가진 것처럼. 에이,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 더 커서 학교를 가면 이렇게 돼. 여학생은 치마 교복을 입고, 남학생은 바지 교복을 입지. 여학생은 속옷을 숨겨 입고, 남학생은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이상한 공기는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을 강요한단다. 오랜 시간 걸려 마련된 이 단단한 기준에, 세상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는 건 아마 불가능 한 일일 거야. 다행히 너는 아직 여성다움이 뭔지 모르고, 그저 아기답게 귀엽고, 웃고, 놀고, 울고, 보채고 가끔 떼쓸 뿐이지만 세상은 언젠가 성별에 따른 기준을 너에게 내밀 거야. 많은 사람이 그 기준 앞에 자신을 두고 스스로를 평가해. 하지만 나는 그저 나여야만 하고, 여성스러워도 남성스러워도 혹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도 마냥 가치가 있어야 해. 거기에 기준은 없어. 기준은 바로 너 자신이야. 맞아, 어려워. 어려운 일이야. 자존감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야. 성별에 따른 선입견은 그 사랑의 폭을 재단하는 가위와 같아. 타고난 성격과 생김새를 싹둑싹둑 자르려고 하지. 여자는 긴 생머리가 아름답다거나, 말투와 행동이 조신해야 한다거나, 애교가 필요하다거나….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거 없어. 자아의 선택이 아닌, 타자의 강요에 따라 살지 않으면 좋겠어. 가위에 잘리지 않으면 좋겠어. 손에 든 가위를 모두 내려놓았으면 좋겠어. 그래 맞아, 어려워. 어려운 일이지.
이 공기는 너무나도 오래되었고, 이 버릇은 너무 깊게 뿌리 박혔어. 네가 거실에서 쿵쿵 뛰어다닐 때 아빠 입에서 “여자아이가 왜 이렇게 험하게 놀아!”라는 말이 나와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냐. 반대로 “사내아이가 활동성이 없어서 큰일이네!”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어도 그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편하게 살자고? 아가야, 딸아. 나는 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증조할머니보다, 할머니보다 그리고 엄마 보다 더 당당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걸 멈출 수가 없구나. 자존감은 중요해. 자존감은 네가 어떤 너여도 너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야.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고, 그건 네가 특별히 여성스러워서, 혹은 그 반대여서가 아냐. 너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 것이고, 너의 모든 사랑을 나도 사랑할게. 거기에서부터 우리 다시 말하고, 주장하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자. 안녕, 나의 아가. 나의 딸.
서효인
시인이자 두 딸을 둔 아빠. 2006년 등단, 2011년 김수영문학상을 받았고, 수상 시집으로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을 냈다. 산문집으로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