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폴라리스>Vol.171 '책아, 놀자!'中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 방향으로 곧장 내달리다 보면 파주출판도시를 만날 수 있다. ‘파주’ 하면 자연스레 ‘책’이 떠오를 정도로, 책에 관한 모든 것이 총망라돼 있는 이곳은 이제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됐다. 아이의 손을 잡고 파주출판도시의 회동길을 걸으면 어느새 우리도 동화 속 주인공이 될 것만 같다.
글 성소영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유재철
책, 도시가 되다
어지러운 삶 속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마다 그 시간을 무사히 지날 수 있는 힘을 주는 한마디는 언제나 책에 있었다. 아득하고 막막한 하루의 끝에서 만났던 그 무수한 구절들은 잔잔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며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용기를 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했다.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도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은, 낙서하고 뒹굴고 늘 곁에서 잠들었던 책들이다. 잠자리에서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통해 우리는 양탄자를 타고 세계를 누볐고, 때로는 괴물이 우글대는 동굴 속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과 함께하는 삶을 만나게 하는 것은 마음의 풍요를 선물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를 만나고, 상상하고, 알아간다.
‘책’을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지역이 바로 파주다.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파주출판도시’는 출판공동체를 꿈꾸던 출판인들이 모여 1989년부터 조성을 준비해 완성한 공간이다. ‘출판도시’라는 이름처럼 책의 기획부터 인쇄,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출판에 관한 전 과정이 이뤄지고 있다.
파주출판도시는 책, 자연, 사람, 건축이라는 네 가지 단어로 압축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갈대샛강을 사이에 두고 세워진 개성 있는 건축물은 출판도시만의 현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아늑하고 잠잠한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나뭇잎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마저 한 편의 시처럼 들린다. 책방, 북카페, 전시관 등 50여 개의 문화체험공간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도 한 권의 커다란 책을 읽는 셈이다.
자유로휴게소를 지나 파주출판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은석교 사거리를 지나 위치한 ‘지혜의숲’에 들르기를 권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천장까지 빽빽하게 책이 꽂힌 서가에서 풍기는 바삭한 종이 내음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20여 만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지혜의숲은 365일 24시간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되는 독서문화공간이다. 폐기될 위기에 처한 책을 모아 공공의 서재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지혜의숲은 개인, 출판사, 단체 등 다양한 사람들이 기증한 책으로 이뤄진 공간이 됐다.
덕분에 1244㎡에 달하는 대지 위에 세워진 이곳에서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것은 탁 트인 창의 햇살을 받은 책들뿐이다. 바닥부터 높은 천장까지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서가는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낸다. 책으로 이루어진 숲 속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을 만나면, 언제든지 책을 꺼내 읽어도 좋다. 어린이를 위한 서가에는 유명 출판사에서 기증한 책들과 함께 그림책 원화를 볼 수 있다.
파주출판도시의 랜드마크 같은 장소라는 것 외에도, 지혜의숲을 가장 먼저 둘러봐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파주출판도시에 대한 안내서와 지도가 배포돼 있기 때문. 너른 출판도시에서 길을 잃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지혜의숲에 들러 지도를 한 장 챙기도록 하자.
책과 문화를 자연스레 접하는 여행길
지혜의숲을 나와 길을 하나 건너면 바로 ‘탄탄스토리하우스’를 만날 수 있다. 어린이 그림동화 전문 출판사인 여원미디어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공연장, 갤러리, 북카페가 결합된 어린이들만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4층 건물은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띌 만큼 멋스럽다. 건물 앞에는 탄탄세계테마동화에 등장하는 자전거 타는 ‘곰돌이’ 조형물이 가장 먼저 아이들을 반기는데, 함께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일등 공신이다.
탄탄스토리하우스는 여원미디어의 김동휘 대표가 우리나라에 어린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너무 적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설립한 복합문화공간이다. 2층에 위치한 사무실을 제외하고는 4층 건물 전부가 모두 어린이들이 마음껏 책을 보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1층 공연장에서는 동화극, 인형극, 마술쇼 등 다양한 공연이 상시로 열린다. 1인 6000원(성인, 유아 동일)의 입장료를 내고 공연을 관람하면, 관람객 어린이에 한해 동화책 1권을 증정해 호응이 좋은 편.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돌고래가 헤엄치는 계단을 올라가면 3층 갤러리와 4층 북카페가 나온다. 갤러리에서는 조각상, 곤충표본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판타지 작품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인형들은 모두 최금화 조각가의 작품. 사람에게 걸린 나쁜 마법을 풀어주는 마법사, 어린아이와 착한 사람들을 지키는 사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여자 등 동화 속 주인공처럼 각자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 갤러리를 한 바퀴 돌며 아이와 함께 조각상들의 사연을 토대로 한 편의 간단한 동화를 만들어 보아도 좋겠다. 조각상과 같이 전시된 곤충표본은 ‘헤르만사슴벌레’ ‘만주점박이꽃무지’ 등 엄마, 아빠에게도 생소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외에도 벽을 장식한 미술품들은 모두 그림책 작가들이 그린 원화다.
4층에는 북카페와 함께 아이들이 동화요리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여원미디어에서 출간한 음식감성동화 <탄탄아이쿡>을 배경으로, 음식 속에 담긴 문화와 건강한 먹을거리, 식습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배우고, 아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아이들은 동화책에서 본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보는 활동을 통해 책의 내용을 더 재미있게 습득하고, 이를 통해 바른 식습관을 가질 수 있다.
북카페에는 여원미디어에서 발행한 그림책이 가득하다. 소장 도서의 양만 약 7000여 권이라고 하니, 웬만한 도서관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숙을 지켜야 하는 기존의 도서관과 달리, 이곳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 내키는 곳 어디든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아이들이 좀 더 책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상상력을 키우는 책 만들기 체험
탄탄스토리하우스를 나오면 ‘회동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자. 잿빛 콘크리트와 초록빛 나무가 어우러진 이 길은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교묘하게 오간다. ‘회동길’이라는 이름은 1897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근대 서점인 ‘회동서관’을 기념해 지은 것. 책의 역사가 담긴 그 길목을 따라 은석교 사거리를 지나면 매년 봄마다 피크닉과 축제가 열리는 잔디광장에 도착하게 된다.
너른 광장을 아이와 함께 뛰다 보면, 광장 맞은편에 친근하게 서 있는 목재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두운 고동색 나뭇결이 멋스러운 외관, 빨간 대문,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어린왕자.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아이들이 직접 책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 ‘몽솔레’다.
낯설게 들리는 ‘몽솔레’라는 이름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해가 뜨는 언덕(MONTSOLEIL)’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자, ‘꿈이 오는 길(夢率來)’, 더불어 ‘꿈’을 의미하는 한자 ‘夢’과 ‘학교’라는 뜻의 독일어 ‘SCHULE’가 결합한 ‘꿈을 키우는 학교’라는 의미가 그것. 어느 뜻으로 읽히든 모두 아이들이 문화와 예술을 즐기면서 다양한 체험을 통해 상상력을 표현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건물 1층에는 인쇄부터 제본에 이르기까지 책 만들기의 전 과정을 지켜보고 아이들이 직접 책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교실이 마련돼 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 아이들이 체험해볼 수 있을 만한 프로그램은 ‘내 손으로 만드는 어린왕자 책’. 한국어와 영어로 인쇄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동화책을 접어 작은 책을 완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가위, 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접어서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도 안전하고 쉽게 책을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노트 만들기’ 또한 엄마, 아빠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책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내구성이 뛰어난 ‘양장 제책 방법’으로 노트를 만들고, 완성된 노트 표지에 데코 패브릭을 오려 붙여 나만의 양장 노트를 디자인해 볼 수 있다. 몽솔레의 모기업인 ‘7321디자인’의 모티브가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어린왕자 등의 동화 일러스트가 인쇄된 섬유 원단은 종이와 달리 질기고 단단할 뿐 아니라 고급스럽고 빈티지한 느낌을 준다. 모든 체험은 1만5000원으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양장 공책 한 권의 가격을 생각해볼 때 매우 저렴한 편. 평소에는 20명 이상의 단체 관람객에 한해 체험이 가능하고 7~8월, 12~1월 등 여름·겨울방학 기간에는 사전 예약을 통해 일반 가족들도 책 만들기 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체험 교실을 나온 뒤, 빨간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7321디자인의 스토어를 만날 수 있다. 동화와 여행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구 상품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아이들은 물론, 부모의 마음까지 들뜨게 한다.
책과 한 걸음 친해지는 시간
이제 책과의 한나절을 되새기며 쉬어 갈 차례. 갈대샛강을 따라 동쪽으로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다다를 수 있는 ‘문발리헌책방골목_블루박스’는 이름과는 달리 ‘헌책방’이 아닌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에 붙은 헌책방골목이라는 이름 탓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제야 왜 이곳에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를 실감한다.
녹슨 철 기왓장을 받치고 있는 통나무가 정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골목처럼 줄지어 선 나무 책장에는 빽빽하게 헌책이 들어차 있다. 꼬불꼬불하고 아늑한 ‘책으로 만든 골목’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LP판으로 음악을 틀어주고, 매일 시간에 따라 영화도 상영한다. 음악이 듣고 싶거나, 영화가 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카페 한쪽에 마련된 스크린 앞에 가만히 앉으면 된다. 1만5000여 권의 책과 음악, 영화 그리고 문화가 함께하는 이곳의 독특한 분위기는 엄마 아빠에게는 향수를,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색다른 추억을 선사한다. 화요일부터 일요일(11시~12시, 14시~15시)까지는 매일 ‘응답하라 1988’ 레코드 콘서트도 진행한다.
헌책을 파는 ‘카페’인 만큼 커피 맛도 수준급. 아이들에게는 고구마라테, 스무디, 요구르트 등을 권할 만하다. 현미와 백미로 만든 가래떡, 토스트, 츄러스, 크림치즈 프레즐과 같은 요깃거리도 판매한다. 헌책방골목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2층에 마련된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서는 어린이 도서를 할인된 가격(5권 기준 1만5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그림책의 종류가 다양하고, 책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덕분에 상태 또한 좋은 편. 1층 나무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도 모두 시중가의 40~70%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니, 아이들에게 마음껏 갖고 싶은 책을 고를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주어도 부담이 없을 것이다.
식당이 많지 않아 고민이 된다면, 이채사거리에 위치한 ‘완이네 작은 밥상’과 지혜의숲 건물 내에 있는 ‘다이닝노을’을 추천한다. 완이네 작은 식당은 친환경 식재료로 건강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소박한 식당이고, 다이닝노을에서는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이탈리아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지혜의숲 내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좋다. TV와 컴퓨터 대신 객실에도 책이 비치돼 있고 24시간 개방하는 지혜의숲은 늦은 밤, 우리 가족만의 오롯한 서재가 된다.
받아쓰기 점수 하나에 연연하기보다 좋아하는 시의 개수를 꼽을 줄 아는 아이, 들에 핀 꽃을 보고 ‘사랑하는 엄마’를 떠올릴 줄 아는 아이를 만드는 힘이 ‘책’에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루 종일 책을 만지고, 보고, 직접 만들어 보는 파주 여행을 통해 아이는 책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