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소설과 함께 여행하다
프랑스의 고서점은 헌책방이라고 부르기에 약간 미안한 면이 있습니다. 질의 여하를 막론하고 책을 무직위로 쌓아놓은 곳도 있지만 주로는 작은 공간 안에 책들을 질서 정연하게 분류해 놓고 희귀본은 희귀본대로 잘 보관해 놓습니다. 선뜻 만지기도 조심스럽게 말이지요. 유럽의 고서점들은 이른바 '헌'책이 아니라 '귀한' 책에 방점을 찍은 서점입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분명 이런 고서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고서점의 수로 말하자면 분명 프랑스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 도시에 두서너 곳 이상은 꼭 있어 보입니다. 보르도에서 고서점 몇 군데를 들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어요. 마지막 방문지인 마르세유에서마저 기회를 놓쳤더라면 괜히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를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마르세유의 고서점 한 곳이 평도 좋았지만 토요일과 월요일에 문을 연다고 나와있었습니다. 주말과 월요일은 많은 가게들이, 서점은 거의 모조리, 휴점을 하더군요. 그런데 이 고서점은 일요일만 쉬고 토요일과 월요일에도 영업을 했어요. 영업시간도 참 별나죠.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문을 여네요. 누가 휴일 아침 9시부터 고서점을 방문하겠어요? 그 '누구'가 있다면 역시나 참 별나다, 소리를 들을만한 사람일 겁니다.
서점은 마르세유 항구로 내려가는 가파른 언덕길에 있었습니다. 인도가 좁아서 반대편에서 사람이 올라오면 옆으로 바짝 비켜서줘야 하는 길. 설마 있을까 하는 마음과, 있다고 해도 설마 열었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걸음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있었어요! 좋아라 문을 당겼는데 열리지 않습니다. 구글한테 또 속았네 싶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구글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줘 여러 번 허탕을 쳤거든요. 그런데 문에 작은 쪽지가 붙어있습니다. '용건이 있으면 벨을 누르시오.'
주인이 나옵니다. 어이구,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을 줄 몰랐노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주춤거리며 들어가 가게를 휙 둘러봤습니다. 무슨 책을 찾으시나요? 주인이 잠시 지켜보더니 묻습니다. 저, 그러니까, 어린이... 그러니까... 그림 있고... 주인은 못 알아듣는 기색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책 찾아요. 주인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그 사이에 나는 입구 서가의 맨 아래에 그림책이 몇 권 뉘어진 걸 이미 봤지요. 주인은 책을 찾으러 다른 방으로 사라졌습니다.
금세 파악이 되더군요. 이 서점에 그림책은 여기 있는 몇 권이 다라는 걸요. 그리고 굉장히 오랫동안 사람들의, 특히 주인의, 관심권 밖에서 잊힌 채 놓여 있었다는 것도요. 먼지가 수북해서 손으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주인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왔습니다. 쥘 베른이에요. 초판본입니다. 보세요.
주인이 들고 온 책은 두툼하고 깨끗하게 잘 유지된 희귀본이었습니다. 쥘 베른의 두꺼운 소설을 들고 어린이 책이라고 가져온 건, 아마도 서로 오해가 있었거나 진짜로 프랑스 어린이들은 그런 책을 읽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내가 쥘 베른 팬인 걸 어떻게 아셨을까나. 하지만 희귀본을 소장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그의 책들은 모두 번역돼 있을 뿐 아니아 원본의 근사한 삽화까지 들어있습니다. 주인은 프랑스어로 열심히 떠드는데 주인의 열의를 봐서라도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문법적으로 맞게 할 수 있는 말 중에 고른다고 한 말이, 이 책은 얼만가요? 사실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숫자는 한국말로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나로서 액수를 정확히 가늠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알아들으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수백 유로는 되는 것 같더군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는 여전히 뭔가 예의를 갖춰야만 할 것 같아서 안 해도 될 질문을, 이번에는 완벽하게 틀린 문장으로, 했습니다. 요런 책, 이런 책, 다 어린이 책 부르나요? 내가 가리킨 책 한 권은 그래픽노블이라고 불리는 프랑스만화책 스타일의 그림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전형적인 그림책이었습니다. 아뇨, 다르죠. 완전히 달라요. 이 책은 예욉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쥘 베른 같은 거 아니고요, 아이들 보는 책 찾아요. 그럼 진작에 그렇게 얘기하셨어야죠. (진작에 얘기했는데요.) 주인은 또 휙 사라졌습니다. 다른 희귀본을 가지러 간 것이겠지요.
그 사이 옆 방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두꺼운 책들이 단정하게 꽂혀 있네요. 주인이 혹여 읽기용으로 쓴 재미있는 어린이 챕터북이라도 들고 오려나 내심 기대를 하면서 서가를 죽 훑어보는데, 벽에 걸린 그림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당나귀가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판화 같습니다. 참 다정한 느낌을 주는, 마음에 꼭 드는 그림이었어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주인이 빈 손으로 돌아옵니다. 없어요. 없네요, 하면서요.
이 그림, 참 예쁘네요. 사진 찍어도 될까요? 아, 네, 찍으세요, 찍으세요. 떼서 #%^&# 빛 #%^&#?? 액자 유리에 빛이 반사가 되니 벽에서 떼내서 찍어도 된다는 얘기 같았습니다. 주인은 또 바쁘게 사라졌습니다. 그러고는 두툼한 책을 한 권 들고 와서 탁자에 탁 내려놓습니다. 저 화가가 #%^&# 책이에요. 이름은 이브 브레이어고요...
당나귀 그림의 화가가 삽화를 그린 책이었습니다. 들춰봐도 되냐고 물으니 어서 보라고 손짓까지 하네요. 삽화들이 역시나 참 좋았습니다. 주인은 옆에서 저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아주 유명한 화가고, 사인을 할 때 꼭 당나귀를 그려 넣고, 내가 왜 이 사람 이름을 버벅거렸을까, 어쩌고 저쩌고.... 주인이 손짓을 해가며 열심히 얘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팔을 휙 드는데, 아뿔싸, 보지 말아야 할걸 보고야 말았네요.
태어나서 본 중에 최고의, 최악의, 곁땀! 바랜 갈색 남방에, 소매 겨드랑이는 낡아서 실밥이 터졌는데, 땀으로 흠뻑 젖어서 갈색이 검은색이 되어버린 그 민망함을 어쩌란 말인가. 내 마음이야 어떻건 주인은 태평합니다. 밖에서 우연히라도 주인을 다시 만난다면 절대 얼굴로는 알아보지 못하겠는데 곁땀으로는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중에 서점을 나와 남편에게 물어보니 남편도 봤다네요. 그걸 어떻게 안 볼 수 있겠어요.
이미 마음속으로 책은 정해놓았기에 아무 망설임 없이 책값을 치르고 발걸음도 가볍게 서점을 나왔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라, 인사를 주고받으면서요. 최선을 다하신 주인께 마음으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책 보여주셔서 감사하노라,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아저씨, 다음에 돈 많이 벌면 다시 가서 쥘 베른 책 꼭 살게요. 이브 브레이어의 책이랑 당나귀 그림도요. 다 살게요. 책들 속에서 아저씨와 함께 한 시간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다 좋았습니다.
내가 산 그림책은 이렇습니다:
주인이 열심히 소개한 프랑스 화가 이브 브레이어는 실제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더군요. 이건 고서점에서 찍은 그의 당나귀 그림이고요:
이건 주인이 보여준 책에 들어있는 삽화입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그가 그린 마르세유 항구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발자크의 소설과 함께하는 여행기에서 발자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3회나 연재했네요. 다음 글에서는
다시 발자크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