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프링버드 Jan 26. 2024

옛이야기 하나

구약 <토비트>를 읽고


무려 5년 전에 담은 유자잼이 있다. 얼마나 진하게 만들었는지 수저로 약간 힘을 주어 떠서 뜨거운 물에 잘 개야 풀어진다. 그걸 어제 다시 끓였다. 냄비에 담고 물을 반컵 부은 뒤에 꿀을 약간 넣어서 끓였더니 병에서 살짝 흔들릴 정도의 농도가 됐다. 힘을 주어 잘라내지 않아도 수저로 부드럽게 떠지는 달콤하고 향긋한 잼. 이런 잼 같은 마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마음 말이다. 다정한 마음 말이다. 마음도 물을 약간 넣고 꿀을 살짝 첨가해서 끓일 수 있다면.  


구약성경을 참 좋아한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많고도 많다. 아마도 저 진한 유자잼을 만들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성경 완독이 하고 싶어서 혜화동 성당에서 40주에 성경을 완독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얘길 누군가에게 했더니 "나는 성경 이야기 중에서 <토비트>가 참 좋아요."  하는 게 아닌가. 읽기도 전에 나는 <토비트>가 대번에 좋아졌다. 그러니 만나기도 전부터 좋아지는 사람도 있다고 누군가 고백한다면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내가 이야기에 대해서 그래봤기 때문이다. 본 얘기를 들어가기 전에 그 얘길 먼저 하자면, <토비트>에서 소년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사랑하게 된다.


토비아는 라파엘의 말을 들어 사라가 자기의 동생뻘이 되고 자기 아버지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자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용솟음쳤고 그의 마음은 사라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6:17)


<토비트>에는 슬퍼하고 절망하는 두 사람이 나온다. 그들의 고통은 너무 깊어서 죽음을 원할 정도다. 그중 한 명, 토비트는 신실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굳은 신앙심이 외려 많은 질시와 고통을 불러와 그는 지금 비탄에 빠져있다. 게다가 시력까지 잃었다. 더운 밤에 밖에서 잠을 자다 참새들의 뜨거운 똥이 눈에 떨어지는 바람에 양쪽 눈에 흰 막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올바르게 살려했던 그를 조롱했다. 늙고 병든 그는 비참하고 가난했다. 그래서 뜰로 나와 울며 기도한다.


나에게는 당치 않은 조롱이 들려오고 많은 슬픔이 나를 짓누르고 있으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주님, 이 고뇌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영원한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3:6)


또 한 사람, 사라는 젊은 아가씨다. 그녀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부부관계도 맺기 전, 아스모데오라는 악한 귀신이 남편들을 번번이 죽여버렸다. 여종은 사라에게 말한다. 당신 남편을 죽인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오... 당신도 그들을 따라 죽어 버리시오. 사라는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기도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나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다시는 이런 조롱을 듣지 않게 하소서. (3:13)


세상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을 피하고 조롱하는 또 다른 이들이 있고, 고통 속에서 누구는 빛을 찾고 누구는 눈을 감는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는 고통에 울부짖는 두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는 분이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라파엘을 보내시며 그 두 사람의 고민을 풀어주게 하셨다... 토비트가 뜰에서 집으로 들어간 바로 그 순간에 사라도 이층에서 내려왔다.(3:17)


 토비트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고 사라 역시 그랬다. 죽고 싶었던 토비트는 유언처럼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죽더라도 어머니를 잘 모시고, 평생 옳은 일을 하며, 옳지 않은 길은 걷지 말거라. 그리고 이십 년 전, 먼 곳에 사는 친척에게 맡겨둔 돈이 있으니 그걸 찾아오너라.


아들 토비아는 아버지께 묻는다. 친척이 내 얼굴을 모르며, 그가 사는 곳을 내가 모르는데, 그가 무얼 믿고 내게 돈을 주며, 어떻게 그곳에 갑니까? 아버지는 말했다. 그와 내가 증서를 써서 두 조각으로 찢어서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너를 증명해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너를 안내해 줄 믿을 만한 사람을 한 명 구해보거라.


토비아는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잘 알아 자기와 함께 가 줄 사람을 찾던 중 천사 라파엘을 만났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그가 하느님의 천사인 줄은 몰랐다. 라파엘은 자신을 유대인이자 토비트도 아는 사람의 아들로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소년은 천사와 함께 길을 떠난다. 그 집의 개도 따라나서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참 흥미로운데, 이 개는 이후에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상상한다. 두 사람 주변을 맴돌며 충실하게 그들을 지켜주는 개의 모습을.)

그러니 이야기의 구도는 이렇게 요약된다: 소년이 절망한 아버지를 떠나 절망한 소녀에게 간다. 절망과 절망을 잇는 여정인 셈이다. 물론 떠날 때 소년은 그것을 몰랐다. 소년은 아버지의 돈을 찾으러 간 것이니까.


<토비트>는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험이야기이며, 모험을 통과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에 신학적으로 이 이야기를 해석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종교적인 마음으로 읽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소년과 천사는 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강 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소년 토비아는 발을 씻으려고 물가에 내려갔는데 큰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올라와 소년의 발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때 천사가 소년에게 말한다. 물고기를 놓치지 말고 꼭 붙잡거라. 그리고 배를 갈라서 쓸개와 심장과 간을 꺼내 잘 보관하거라. 소년은 그렇게 했고, 남은 살은 일부는 구워 먹고 나머지는 소금에 절여 두었다.  


둘은 여정 중에 토비트의 친척 라구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라구엘은 바로 사라의 아버지였다. 절망에 흐느끼며 죽기를 원했던 그 소녀, 토비아가 라파엘의 말을 듣고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린 소녀 사라 말이다.

 

천사 라파엘은 라구엘의 집에 가기 전에 소년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사라에게 청혼을 하거라. 너는 라구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니 그럴 자격이 있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는 소년을 안심시킨다. 물고기의 간과 심장을 향불 위에 올려놓아 냄새를 피우면 귀신이 사라에게서 영원히 떨어질 것이다.


소년은 위에서 말했듯이, 만나기도 전에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라파엘의 조언대로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리고 사라와 무사히 첫날밤을 보냈다. 이제 소년은 여정의 끝인 아버지의 친척에게서 돈을 돌려받은 뒤,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사라의 부모는 소년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슬픔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자네는 2주 동안 여기 내 곁에 머물면서 먹고 마시게. 지금까지 모든 괴로움에 멍든 내 딸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게.


할 수 없이 토비아는 라파엘에게 자기 대신 친척 집으로 가서 돈을 받아와 주길 부탁했다. 라파엘은 그렇게 했고, 어쨌든 귀향은 계획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향집에서는 소년의 어머니가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비트의 아내이자 소년의 어머니 안나는 아들의 귀향이 늦어지자 근심하고 애통해하며 넋두리를 한다. 아이고  내 신세야, 내 눈이 어두울 때 내 빛이 되어 줄 너를 어찌하여 내가 떠나보냈던고!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것이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노후가 걱정되었던 것일까. 아들을 붙잡는 모성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심리학에서 이미 밝혀놓았다.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참 안 된 얘기지만, 뜨거운 모성이 아들의 성숙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어머니에게 붙잡힌 아들은 크지 못한다. 오죽하면 '잡아먹는 어머니'라는 말이 있을 정돌까. 효성스러운 아들, 자애로운 어머니의 아름다운 관계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나의 유자잼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마침내 소년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자신을 동행했던 이가 천사 라파엘이었음을 알게 된다. 라파엘의 조언에 따라, 소년은 아버지의 눈에 물고기의 쓸개를 발라드린다. 그러자 토비트의 눈을 덮고 있던 흰 막이 벗겨지며 그는 시력을 되찾게 된다.




절망에 빠진 한 늙은 남자에게서 순수하고 맑은 소년이 나와 소녀에게 간다. 소년은 남자의 육체에서 생겨난 물리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읽자면 남자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린 영혼 아닐까.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은 깨끗한 영혼 말이다. 그러한 영혼이야말로 절망에 빠진 소녀를 구해낼 수 있는 게 아닐지.


소녀와 함께 돌아온 그 영혼의 힘으로 늙고 병든 남자는 시력을 되찾는다. 세상의 때, 마음의 때로, 그의 눈은 물리적으로는 세상을, 상징적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눈에서 막을 걷어내는 것은, 모험을 통해 성숙한 어른이 된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의 내장이다. 물고기로 상징되는, 우리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길어낸 힘은 언뜻 너무나 원시적이어서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보물이자 지혜일 수 있다. 물고기의 간과 심장으로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준 것 역시 이런 상징으로 읽고 싶다.  


민담의 형식을 갖춘 이 성경 이야기는 모든 민담이 그렇듯 어리고 미숙한 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 모험을 치르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어린 청년이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그가 모험을 잘 치러낼 수 있게 도와줄 조력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민담의 이런 형식은 현대의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다. 영화를 봐도, 소설을 읽어도, 그 안에서 선한 주인공과 악한 적대자, 그리고 조력자가 기본적으로 등장한다.




'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꿈을 자주 꾼다. 완전히 낯선 곳에서 헤매기도 하고, 정거장 표지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집으로 가는 버스가 없거나, 전철을 놓친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모르겠다. 내가 왜 이렇게 헤매고 있는지를. 어쩌면 어릴 때 시장에서 엄마를 잃었던 경험 때문일까? 서너 살쯤의 일 같다.


커서 엄마한테 그때 일을 물어봤다.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어른들-그중에는 경찰도 있었고 상인도 있었는데-에게 우리 집을 묻고 다녔고, 골목 안 파란 대문에서 엄마가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걸 정면으로 봤다. 어린 나는 당찼고 대단했다!


놀랍게도 엄마에게서 들은 사정은 달랐다. 엄마가 시장에서 울며 헤매고 있는 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얼른 생각키로는, 어른인 엄마의 기억이 맞겠지 싶지만, 어린아이의 기억을 무시 말라고 항변하고 싶다. 어린 딸아이를 잃은 어른의 죄책감이 무의식 속에서 '아이를 찾아내는 책임 있는 엄마'로 기억을 조작했을지 누가 알랴. 내가 기억 속에서 용감한 어린 모험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 시시비비를 따질 생각은 전혀 없다. 용감하고 당찬 어린 모험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은 진실이니까. 진실은 꼭 현실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시장에서 당차게 길을 물어 집을 찾아간 나는 심리적 현실이자 실재했다고 믿는다


<토비트>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도 내 여정을 가는 동안 라파엘 같은 조력자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처럼 나 역시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을 따라오며 지켜주는 개도 있을지 모르지. 그랬으면 정말로 좋겠다.


집을 찾아 헤매는 꿈을 다시 꾸게 되면 그때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싶다. 모르는 곳이어도, 표지판에 아는 버스 노선이 없어도, 전철을 놓쳐도, 손을 가슴에 얹고 가만히 숨을 고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다려보는 거다. 위장한 천사를, 다정한 개를. 강에서 뛰어올라 내 발을 깨물려고 덤비는 물고기가 있으면 용감하게 그걸 낚아채서 제압해 보는 거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에게는 분개할 의무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