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린이라는 세계"

by 스프링버드


김소영 작가님, 이러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님이 나를 너무 행복하게 만드신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있는데 너무 아까워서 더 읽고 싶지 않다. 한 챕터를 남겨 놓았다. 기쁨을 아껴서 이따가 누려야지, 이따가 밤에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읽어야지, 하는 약은 계산을 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이 너무너무 귀엽고 착하고 우습고 독창적이고 무엇보다 반짝반짝 귀하다. 그 어린이들을 묘사하는 김소영이라는 어른도 너무너무 선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고, 역시나 반짝반짝 귀하다.


최근에, 더 정확히는 올해 즈음, 동심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우리가 이 한정된 인생을 사는 이유는 뭘까. 그 생각을 길게 연장해 보니 결국에는 어린이로 닿았다. 어린이의 마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건 부질없고 그저 오늘 하루를 잘 살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의 시간이 달려가는 궤도의 전체 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궁금했다. 도착지는 어딜까 하는 궁금증. 이 짧은 삶을 뱅글뱅글 돌거나 무작정 내달리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고 해탈이나 열반이나 천국 같은 거창한 걸 꿈꾸지는 않았다. 다만, 좀 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작은 의미는 알고 싶었다. 아마도 내 나이가 이제 그럴 때가 됐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헤매며 넘나들었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유년기의 행복감으로 이후의 인생 전체를 버티는 것이라고. 이런 근사한 생각을 지인에게 말로 꺼내놓으며 내가 뭔가 중요한 걸 안다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건 순전히 관념의 유희에 불과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그저 허공에다 멀리 던졌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한 말을 뒤따라 잡는다. 이걸 주워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내가 던졌던 말이었어? 미심쩍어하면서. 뭣도 모르고 한 말인데 허튼 말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을, 관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게 된다.


사람은 유년기의 행복감으로 이후의 삶을 버틴다는 이 말속에는 진짜로 진실의 한 조각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말하면 불행한 어린이였던 어른들은 모두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실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나도 많이 행복했던 어린이는 아니었고, 행복했던 기억이 1도 없다는 어떤 어른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유년기의 행복감으로 이후의 삶을 버티는 게 맞다고 이제는 믿는다. 그때 나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는 분명 사랑스러웠을 것이므로. 자신이 사랑스러운 줄 모르고 심지어 주변 어른들에게 구박덩어리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어린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빛난다. 황금이 돌덩어리 취급을 받아도 황금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불행한 어린이였던 지금의 그 어른도 빛나는 존재였던 과거가 있다. 진실로.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어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불행했던 일도 행복했던 일도 시간이 갈수록 더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하지만 상상으로라도 과거의 어린 나를 그려본다. 존재 자체만으로 완벽하게 귀하고 빛나는 한 어린이를. 그래서 행복한 유년기를 풍성하게 잘 산 사람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나도 그만큼 가졌으니까 말이다.


김소영 작가님은, 그러나, 부럽다.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어린이스러움에 대해 생각하고 감탄했다. 어린이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어린이와 온전하게 눈을 맞출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내 키를 아주 낮추기도 해야 하지만 마음도 아주 깨끗하고 순수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럴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아니, 드물다. 오늘도 나는 너무너무 어른인 어른들 속에서 어울리다가 돌아왔는데, 이 어른의 세계가 오늘따라 유난히 시시하게 느껴졌다. 어젯밤에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이 책을 마저 읽다가 아까워서 멈췄다.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으면 되겠지만 아직 읽지 않은 마지막 챕터에 들어있을 깨알처럼 귀엽고 재밌는 기쁨을 되도록이면 마지막까지 신상으로 아껴두고 싶어서.


아람이는 한글을 떼고 혼자서 책 읽기를 시작했을 때,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와서는 한두 줄 낭독하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같이 읽을래요?

이만큼 달콤한 제안이 또 있을까 싶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어금니가 빠진 초희가 어떻게 뺐는지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설명하다 내게 물었다.

"이 막 흔들려 가지고 마지막에 거의 다 됐을 때 엄청 떨리는 거, 선생님도 알죠?"

"기억하세요?"가 아니라 "알죠?"다. 나도 당장 아홉 살로 돌아가 "당연하지!"하고 맞장구를 쳤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뺀 이는 사랑니로 그것도 십수 년 전이고 마취도 했었지만, 어쨌든 겁에 질렸던 건 마찬가지니까. 내가 주사 맞는 걸 무서워한다고 했더니 지영이는 자기가 독감 예방주사 맞은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도 울고불고했어요?" 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만하면 어린이들이 나를 친구로 여긴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p.156)


어린이들에게 "알죠?"라는 말을 들으려면 내 키가 얼마나 낮춰지고 내 마음이 얼마나 깨끗해져야 할까? 우리 어른들도 어릴 때가 있었다. 그때의 어린이가 지금까지 잘 있어주어서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일 게다. 그 어린이가 사랑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존재 자체가 사랑이었다는 진실을 지금은 알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옛이야기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