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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Feb 09. 2024

장 아메리의 말

<자유죽음>을 읽고


이 책은 장 아메리가 자유죽음이라는 말로 부르고자 했던, 우리에게는 자살이란 명칭이 더 낯익은, 죽음의 한 형태에 관한 글이다. 먼저 얘기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이 자살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옮긴이 김희상 씨의 지적대로,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내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강요하는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자유와 ‘우리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자’는 주장을 이야기한다. 아메리가 ‘자유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분명 ‘죽음’이 아니라 ‘자유’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삶에 대한 ‘구토’를 강하게(!) 느끼며 죽음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의 인생 체험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성의 끝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던 1930년대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나치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뼈가 으스러지고 항문에 오물을 집어넣는 치욕스럽고 모진 고문을 당했고,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내다가 독일이 패망하면서 다행히 살아 나왔다. 그에게 고문은 살아 있기 때문에 체험하는 죽음의 고통이었다. 삶이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부조리이자 역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삶과 죽음의 부조리와 역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중 극소수는 필시 그것을 체험했던 적이 있거나 지금 체험하고 있거나 앞으로 체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편으로 그의 경험이 보편적 철학을 뒷받침한다고 한다면 다분히 경솔한 짓일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경험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의 경험은 시대와 사회와 그의 내적 세계가 만들어낸, 유일한, 그만의 길을 내었을 뿐이다.       



    

그의 책은 총 5장으로 나뉘어 있다. 서문에서 그는 자살을 밖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보기를 권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유죽음의 현상학’을 말하고자 한다. 자살자의 내면은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자살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말이다. 다음은 각 장의 요약이다:     


1장: 뛰어내리기 전에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처녀 가정부로, 인기 있는 가수를 사랑했고, 그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절망에 빠져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프로이트도 죽음을 선택했다. 인간과 삶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은 학자인 그 역시 극한의 고통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구강암 말기였던 그는 주치의에게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니 자신을 해방시켜 줄 주사를 놓아달라.”라고 했다.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주치의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타인의 손을 거치기는 했지만 이게 자살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허구의 인물, 구스틀 소위의 고통은 오히려 프로이트보다 훨씬 정신적이었다. 아르투르 슈니츨러의 <구스틀 소위>에서 그는 자살을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제빵사와 시비를 벌이다가 덩치에 밀려 칼을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가 정한 명예 규정에 위반되는 불명예스러운 행위였다. 그 상황에서 그는 퇴역 신청서를 제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황제가 하사한 제복’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정체성이자 존엄성의 상징이었다.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고유한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의 상황은 그들에게 진정한 비극이다.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라고 프로이트가 말했던 그것 말이다.  


물론 가정부는 구조되고 치료를 받아 마음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치료를 받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게 된 그녀는 다만 ‘다른 사람’이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살아가며 통과하는 모든 시기, 모든 인생의 순간들은 저마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뛰어내리는 순간만 보자면, 가정부 처녀는 가수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진솔한 인생을 산 것이다.


태어났으면 살아야 한다는 생명의 법칙, 생명의 논리로 세상은 자살자들을 비난한다. 이것은 사회가 규정한 법인 동시에 자연법이다. 생명은 궁극적인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생명보다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도 있다. 구스틀에게 황제의 군복은 생명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고, 가정부 소녀에게는 사랑하는 그 가수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처럼 보일지라도.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수명이 다해서 죽는 자연사를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보통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 죽음은 외부에서 볼 때만 자연적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건강을 해치는 행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죽음을 앞당기기도 하지 않나. 


자살은 자연적 사건인 죽음을 돌연 주관의 문제로 만든다.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개인도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다. 평범하게 살라고 말이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실패는 누구에게나 있으니 참고 살라고 한다. 아메리가 에셰크라는 프랑스어 단어로 지칭하는 실패는 이른바 총체적 실패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개인의 주관에 달려있다. 가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한때의 열병일 수 있지만 그 가정부에게는 총체적인 실패였다.


가족과 친구들은 네 고통은 알지만 참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지독한 쓰라림 속에서 에셰크를 삭혀야 하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자유죽음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에셰크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자유죽음은 인간의 특권이다. 사회는 사회의 척도로 삶의 기준을 재지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척도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그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사건일 수 있다. 그에게 병들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반자연적인 행위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사회는 ‘개인’을 보고 ‘개인의 에셰크를 포용’ 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개인에게 인정해 주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며, 이것이 진정한 휴머니즘이다.     


3장: 손을 내려놓다

인간에게는 생존 본능만큼이나 죽음에 끌리는 성향도 있다. 자유죽음을 택한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에 끌리는 과정을 겪어왔다. 자신의 존엄성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굴욕을 경험해 왔다. 죽음에 끌리는 성향은, 인생에 있어 부단히 무엇인가 추구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좌절하며 체념과 포기를 할 때 이 죽음의 성향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 대목에서 아메리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는 30시간 정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적이 있는데, 온몸에 바늘이 꽂혀 있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무방비로 내맡겨져 ‘물건’과도 같았다. 그는 좋은 뜻으로 그를 살려준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다시 살아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죽음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죽음에 대한 성향은 에셰크를 당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밤새워 가며 일하는 상인, 술과 커피를 마셔가며 죽도록 글을 쓰는 작가, 줄담배를 피워가며 심장을 망가뜨리는 흡연가의 행동도 생명 논리에 반하는 짓이다. 그들의 행동이 단순히 가족과 작품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만은 없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세상을 구한 영웅, 예수님의 순교까지도 모두 잠재적 자살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자살자는 오롯이 자신의 결심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어떤 권위도 그에게 살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로 내린 결정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이다. 죽는 순간, 그의 시간은 사라지지만 ‘나’라는 그의 자아는 또렷해질 것이다. 비록 그의 자아는 그에게 여전히 어려운 수수께끼로 남겠지만.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

종교와 사회는 인간에게 결정의 자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실존적으로 사람은 고독하며, 타인은 내 존재의 기반이 되어줄 수 없다. 나는 타인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나 동시에 타인은 나의 거울이기도 해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증오하는 것은 주로 타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선험적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만은 확고하다. 자살자는 결정적인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에, 사회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 그는 자신과 일대일로 마주 본다. 이것은 실존적 자기 결단의 문제다.


여기 한 가장이 있다. 퇴근하는 길. 그는 지치고 피곤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을 쉰다. 내일도 모레도 달라질 것은 없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마침내 그는 끝장을 내기로 한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 그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게 정말 꼭 지켜야만 하는 의무일까? 그의 가족이 그를 쓸모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생각해 주었는지는 그가 목숨을 끊고 난 다음에야 분명해지리라. 


한편, 자살이 도움에 대한 호소며 구조 요청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자유죽음은 오히려 자살자가 세상에 혹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하는 편이 맞다. 자신의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메시지: 잘살아! 그래도 참 멋지고 아름다운 게 많은 인생이었어. 내가 가야만 하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떨어져 나가는 아픔 속에서도 나는 만족한다.


자살은 정신분석학에서 얘기하듯 자기를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증오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행위를 자살로 보는 시각은, 살인이 적대적인 외부 세계를 겨누는 것이고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인데 반해서,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5장: 자유에 이르는 길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자 ‘무엇에게로’의 자유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벗어나 희망하는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자유죽음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얻지만 무엇으로 나아가는 자유는 얻지 못한다. 억압을 깨고 해방되는 순간, 자유는 사라진다. 자유죽음은 자유에 이르는 산책길일 수는 있지만 자유의 땅 자체는 아니다. 죽음 이후에 나는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고 자유는 체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완벽한 부정이며 ‘무’다. 자유에 이르는 길은 내가 그 길을 진지하게 걸어갈 때만 길이 된다. 그러나 그 어디로도 나를 이끌지 않는 길이다. 자유죽음은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체념이다.

 

자유죽음은 그래서 무의미하지만 자유죽음을 선택한 결단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월계관을 쓰고 자신을 한껏 뽐내는 곳에서조차 에셰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를 곧바로 자유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쪽과 저쪽에 양다리를 걸친 부조리라는 인생의 기본 구조에, 특수한 갈등 상황이 곁들여지게 되면, 우리는 경악한다.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선다. 자유의 땅은 탐스러운 과일로 가득한 에덴 정원이 아니다. 자유의 땅은 자유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고통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거짓말로 스스로를 타이르는 대신 진솔하게 죽음을 선택한다.


자유죽음은 도피가 아니다. 도피는 무엇에서 벗어나 무엇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은 무엇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굴욕의 모멸감을 맛보느니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의 특권을 누리며 죽기로 진지하게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 죽음 안에서만 근원적 자아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으며 ‘진리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죽음의 성향을 느끼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개 사람들은 존재와 실존함 위에 견고하게 자리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자보다 우월할까? 그들은 주어진 그대로에 만족하는 게 아닐까? 그들은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삶에 대한 역겨움을 부정하며, 긍정과 부정의 균형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굴욕과 에셰크를 이겨내는데, 많은 경우 그것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일 뿐이다. 그는 동물적 본능과 사회적 의무에 충실한 인간이다.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그는 비로소 의무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자유죽음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인가를 물을 수 있다. 자살자가 자신의 실존을 지워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기로 결심을 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무수한 원인들이 있다. 유전적 요인, 환경의 영향, 일일이 헤아리기 힘든 특수 상황들, 정신이 성장해 온 정황 등 온갖 우연과 필연이 서로 맞물리며 당사자를 결단의 상황으로 내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과의 고리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그의 자유의지다. 포로는 비록 불가능할지라도 탈옥을 할지 말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수는 살기를 선택하고 극소수는 죽기를 선택한다. 비슷한 성향과 성장 과정을 거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은 자살자의 결단이 그만큼 자유롭게 그리고 홀로 이뤄진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다운 존엄과 자유가 없는 삶에서 빠져나올 때, 죽음은 곧 삶이 된다. 탄생의 순간부터 사람은 죽어가는 것처럼, 죽기로 당당히 각오하는 순간 삶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아메리는 주관의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을 거듭 강조한다. 살아서 웃고 호흡하며 성큼성큼 걷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유죽음은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행위다. 그러니 자유를 찾아 나서겠다고 길을 떠난 사람을 비웃고 헐뜯지는 말자고 그는 부탁한다. 이 길은 자살자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길이다. 자살자의 정황은 좋지 않았고, 타인들은 그 정황 속에 들어가서 그가 되어 살지 않았기에 그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아메리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 행위 앞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 그들 앞에서 우쭐대며 무시하는 행동은 보이지 말자는 것이다. 다만 연민의 마음을 지니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우리를 버리고 갔냐고 정 따지고 싶다면, 자유로운 선택으로 자신의 길을 간 그 사람에게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물으라는 것이다.      

아메리의 자유죽음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죽음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삶 속에서 인간이 누려 마땅한 권리인 자유와 존엄성과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 갖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자유죽음은 곧 삶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고유한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는 그의 말,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는 그의 말로 이 책은 다 설명되는 것 같다.      


아메리는 나치스에게 쫓겼던 유대인 철학자 파울 루트비히 란츠베르크를 거론하면서, 그가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뜻에 맡긴 이야기를 한다. 란츠베르크는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통받게 버려두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씻어 하늘의 은총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단련하려는 뜻에서다. 아메리는 란츠베르크의 생각을 비판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생각이고, 동의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선택이지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신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점을 그는 분명히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살고 어떤 때 죽으며 무엇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앞장서서 규정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아메리는 이 책을 쓰고 2년 뒤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책상 위에는 호텔 숙박료와 함께, 호텔에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그의 죽음을 비난했다. 레비 역시 아우슈비츠 생존자였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것이 인간인가>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으로 남겼다. 그는 ‘증언’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그런 그였기에 아메리의 자살은 무책임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그는 한 장을 오롯이 아메리에게 할애했다.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이라는 부제를 붙인 까닭은 지식인으로서의 아메리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레비 자신은 집단수용소에 들어가기 전, 지식인이 아니었다고 자평한다. 따라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아메리와는 달리 받아들였다: 내게 라거(강제수용소)는 일종의 대학이었으며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인간을 가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p.171)


레비가 보기에, 아메리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규정했으며 그런 이유로 ‘사실상 그의 시선은 위를 향해 있’어서 ‘지성이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어버린 지친 인간에 그의 시선이 머무는 일은 드물다.’ 이 말은 노골적인 비난처럼 들리는데, 이 비난은 장 말미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된다: 이 지점(라거에서의 죽음)에서 나의 경험과 기억들은 아메리의 그것들에서 갈라져 나온다. 아마도 내가 좀 더 젊고 그보다 더 무지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덜 괴로웠거나 죽음을 덜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한 번도 죽음에 바칠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수많은 일들로 쉴 틈이 없었다. 빵 조각을 찾는다거나, 무지막지한 노동을 피한다거나, 신발을 덧댄다거나, 빗자루를 훔친다거나, 내 주위의 얼굴들과 징후들을 해석하는 일 따위로 말이다.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이며, 이는 라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p.181)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기 전, 프리모 레비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화학도였다. 장 아메리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은 전력이 있는, 레비보다 좀 더 나이 든, 문학과 철학 전공자였다. 두 사람은 같은 수용소에서 같은 경험을 했으되, 본질적으로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성품으로 다른 경험을 하면서 다른 가치관을 형성한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삶과 죽음에 대응하는 방식은 달랐고 따라서 당연히 다른 길을 내었다. 그리고 다른 걸음걸이로 그 길을 걸었다. 여기서 누가 옳고 누가 바르고 누가 합당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레비는 레비만의 고유한 상황이 있었고 아메리는 아메리만의 고유한 상황이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상황’이란 객관의 외적 세계가 개인의 내부로 들어와 만들어지는 주관적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 아메리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수밖에: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고유한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 김희상 씨의 옮긴이의 글과 김남시 씨의 해제는 반드시 읽어보았으면 한다. 자살과 자살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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