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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Feb 23. 2024

잠시 '고요'하게 있고 싶다


점묘법을 창시한 화가로 알려진 조르주 쇠라의 그림 속에는 고요함이 있다. 그의 그림이 그렇게 고요한지 알게 되기까지는 길고 긴 오해의 시간이 있었다. 점을 찍다니 참 시시하기도 하여라, 중고생 시절의 나는 그를 한없이 가볍게 보았다. 미술 시간에 접한 쇠라의 점묘법을 미술사의 짧은 에피소드쯤으로 무시하고, 그저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재밌게 놀아볼 수 있는 놀이 정도로 치부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르고 장년이 되어 루브르박물관에서 그의 자그마한 그림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엄청나게 크고 휘황찬란한 작품들 속에서, 떠들썩한 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 속에서, 그의 그림은 참 소박했다. 물론 쇠라도 큰 작품을 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가 본 작품은 크기로 볼 때 작은 편이었고 눈길을 끌어당길만한 특별한 위치에 걸려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소박한 크기로 그저 조용히 그곳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마치 숲 속의 작은 연못처럼.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 연못을 찾게 되었던 셈이다.




정말로 그랬다. 그의 그림은 작은 연못 같았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곳은 돌연 조용해졌다. 귀도 눈도 마음도 모두 차분해졌다. 소란스러운 주변 소음도, 왁자지껄한 내 마음의 소음도 멈췄다. 그림을 보면서 내가 경험한 잠깐의 그 시간을 형용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고요함이었다. 마침내 쇠라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쇠라가 소묘의 대가라는 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소묘에 있어서 그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한다. 그의 기여가 어떠했건, 그의 소묘는 다채로운 색점들이 감상자의 눈 속에서 이뤄내는 변화무쌍한 조화 없이 그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이어지는 미묘한 이동, 종이 표면과 흑연의 물리적 밀착과 밀도를 세심하게 보게 된다. 색점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계산하며 그림을 그렸던 쇠라는 소묘에서도 빛과 어두움의 조화를 치밀하게 따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을 모르는 내 눈에도 그의 기교가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색채화든 소묘든 쇠라의 그림 속에는 공통적으로 고요함이 있다. 아주 조용하다. 소리도 없고 마음의 흔들림도 없이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다. 순간의 포착이랄까.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인간사 역시 복잡하게 뒤엉켜 굴러가고, 사람의 마음도 요동을 치는데, 한 찰나,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해 보라. 모두 정지된다. 세상도, 인간사도, 나도. 그리고 그렇게 멈춘 채로 '우리 잠시만 쉬어볼까요, 잠시만 말이죠.' 그림은 권유하는 것만 같다.


쇠라가 이끈 숲 속 연못은 한없이 맑고 조용하다. 하지만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소금쟁이며 나뭇잎들이 떠다니면서 작은 동심원을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올챙이들이 열심히 자라고 있을지도. 연못 위로 문득 바람이 선들 불며 물을 쓸며 지나갈지도. 그 순간은 아무 때나 목격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내가 조용히 멈출 때, 시선을 가만히 놓아둘 때, 마음이 차분할 때, 연못의 고요함을 만날 수 있다. 쇠라의 그림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나는 이렇게 얘기하겠다. 살아있는 생명들로 환하고 원만하며 충만한 세계, 고요함이 새롭게 열어주는 활기의 세계라고.


하루 종일 빈집에 나 혼자 있어도 내 마음은 소란하기만 하다. 고요한 시간이 없다. 음악을 틀어놓고, 뉴스를 보고, 책을 보고, 개를 산책시키고, 무료해하고, 고민한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룬다. 이 모든 게 너무 시끄럽구나, 탄식한다. 고요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쇠라의 화집을 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열리는 고요함을 만난다.  


나만 그럴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음이 시끄러운 것 말이다. 사람들의 외면만 보고 저 사람은 참 조용하고 차분하네, 하는 착각을 많이 했다. 나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때도 가끔 있다. 모두 오해다. 내가 하는 오해, 남이 하는 오해. 고요한 그림을 그린 쇠라 역시 생활인으로서는 그렇게 평온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도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 고요함을 담아낼 수는 있었다. 생활인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술가로서 해낸 것이다. 예술은 저 밤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아주 멀리서 빛날 뿐이라, 절대적 고요란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술가인 쇠라도 감상자인 나도 잠시, 아주 잠시만, 그것을 만나고 또다시 시끄러운 세계로 마지못해 나올 뿐이다. 안타까운 운명랄까.


마음이 하도 시끄러워서 해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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